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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학회 우리문학연구 우리문학연구 제17집
발행연도
2004.12
수록면
29 - 41 (1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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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歌謠 「彗星歌」는 日本兵의 동향에 관계되어 만들어진 노래로 「전쟁과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대표적 가요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 日本에 인질로 간 新羅의 王子를 구출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憂息曲」 「치述嶺曲」 등이 不傳歌謠로서 전하고 있다. 이렇게 日本과 관련된 新羅歌謠를 중심으로 新羅의 對日本觀, 歌謠와 종교적 의식과의 관계 등에 대하여 私見을 발표하는 것이 本稿의 목적이다.
「彗星歌」에는 「日本兵」으로 기재되고 있는데, 과연 언제부터 新羅에서는 倭와 日本을 구별하였는지, 거기에 따른 사건과 역사기술에 차이가 있는지 이런 의문으로부터 출발점을 찾아보았다.
『三國遺事』에서 日本과 관련된 대표적 이야기는 「延烏郞 細烏女」 「奈勿王 金堤上」 「融天師 彗星歌」 등이 있는데, 2세기 중엽의 이야기로 되어 있는 「延烏郞 細烏女」에서는 “日本”으로, 5세기 초의 이야기로 되어 있는 「奈勿王 金堤上」에서는 “倭”로 표기되어 있어, 국명에 대한 의식차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三國史記』에서는 비교적 확실한 구별을 하고 있다. 즉 “倭”란 국명은 赫居世王 때부터 보이며, 신라를 침범하려고 했다는 기사이다. 이후 “倭”의 침범은 新羅가 律令을 반포하는 法興王7년(520)까지 무려 35건 정도의 침범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율령반포 후부터는 침공 기사는 안보이게 된다. 新羅가 통일을 한 후, 日本도 702년에 律令을 반포하게 된 후로는 외교사절단의 왕래가 있고, 聖德王2년(703)에 처음으로 “日本”이란 국명이 나타난다. 예외는 있지만, 이후로는 “日本”과의 외교관계가 발전되어 9세기 초의 哀莊王시대에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나타내는 기사가 많이 나타나며 新羅말기까지 계속된 것 같다.
「彗星歌」의 관련 기술은 倭의 침공이 있었던 시대의 것이다. 倭의 침공을 대비하여 행하여진 “降伏儀式”에서 불려진 鄕歌로 생각되는데, 新羅가 통일 직후에는 「大王巖」, 「感恩寺」, 「萬波息笛」 등으로 倭를 물리치기 위한 종교·신앙적 행사를 갖게 된다. 적대시한 관계를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祭儀式으로서 倭兵을 물리치려 했는지 그 내용을 전하는 기사는 찾을 수 없지만, 「彗星歌」와 같은 祭儀式도 행하여졌으리라 생각된다.
「彗星歌」는 倭兵을 침공을 대비한 “降伏儀式”에서 행한 것으로,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던 사건으로, 그 전모는 『日本書記』 推古條 10년(602)의 기사가 전하고 있다고 추정하였다. 出兵 도중에 장군과 그 妻가 죽는 사건이 일어나 침공을 그만두는 사건인데, 新羅에서는 祭儀式의 효과로 보게 되었고, 오히려 慶福스러운 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彗星歌」는 唱者의 소망을 노래하고 그 소망대로 되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된 呪術歌라고 생각한다.
「彗星歌」와는 달리 不傳歌謠로 전해지고 있는 「憂息曲」은 人質사건으로 인한 재회의 기쁨을 노래한 서정가로 생각되며, 「치述嶺曲」은 비통하게 죽어 神母가 된 朴堤上의 妻에게 바치는 祭儀式謠이었지 아니였을까 생각된다.

목차

Ⅰ.はじめに

Ⅱ. 「倭」から 「日本」へ

Ⅲ. 倭兵擊退のための宗敎的儀式

Ⅳ. 日本と關連ある不傳歌謠

Ⅴ. むすび

國文要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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