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과 다른 양명학의 특정 가운데 하나는 대중과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몇몇 선각자의 권위나 경전, 혹은 외부 사물에서 진리를 찾지 않고 각 개인의 내면에서 찾을 것을 주장하였고, 진리의 내용 또한 저 위에 있는 (우주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현실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계로의 죽음에 대한 물음의 답인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공자의 말은 이후 유가를 죽음에 대한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유가가 오직 삶의 문제에만 천착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게 되었으며 이 점이 죽음 앞에서 나약해질 수 밖에 없는 대중들과의 거리감을 더욱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유가의 근본적인 목표는 누구나 실천을 통하여 성인의 길에 들어서는 데에 있다고 할 때, “길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 모두가 성인이다[滿街都是聖人]”라는 양명학자들의 구호는 당시 대중들에게 신분이나 처한 환경을 떠나 누구나 聖人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는데, 융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인격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임(selfhood)과 자기실현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화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성과 보다 조화된 생활을 할 수 있다.’ 라는 가르침을 전파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일생생활의 경험, 특히 갓난아기[赤子]때의 모습에서 찾을 것을 주문하였다. 성장한다는 것은 천진난만함에서 벗어나 욕망의 굴레에 들어섬을 의미하고, 전통적으로 유가에서는 욕망의 억제를 통한 인격의 완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욕망의 제거는 결국 윤리적 영역에 머물 수 밖에 없고, 윤리적 영역에서 천진난만한 즐거움을 얻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 사는 것이 정말 재미없네!”라고 한탄할 때가 있다. 개인의 삶을 이끌어가는 궁극적인 힘이 ‘의미’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어느 시점이든 이 한탄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의 부재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왜 재미없지?”, “어떻게 하면 재미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고 자각의 문제이다. 자각된 내용은 실천을 수반해야만 한다. 그리고 실천은 반드시 내면적 확신을 통한 기쁨으로 이어져야 한다. 유가에서의 삶의 의미는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고 관계 속에서 가정에서 작은 동아리로 사회 전체로 실천하면서 확충하다 보면 최후에는 우주와의 일체감을 느끼게 되고 이 일체감에서 존재 의의와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희열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가지고 태어난 것이고 이 점에서 본래 모습을 회복하면 된다는 것이 나여방의 생각이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良知’를 실천하기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양명학의 선언은 물론 내면의 도덕적 자각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교화의 영역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를 통하여 聖과 凡, 貴와 賤의 울타리를 넘어서 서로가 평등한 입장에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명대 학문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죽음을 직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李贄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을 학문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술회하며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生死大事의 해결에 있다고 하였듯 명대에 이르러 죽음을 다시 불러내었다. 그리고 학문의 최후의 경지를 ‘즐거움’이라고 한 태주학파의 전통 속에서 ‘즐거움’은 모든 불안이 사라진 상태를 포함한다고 할 때,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불안이 사라진 상태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