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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종철 (인하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4호
발행연도
2011.3
수록면
249 - 275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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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베커(Arthur L. Becker)는 1903년 한국에 와서 1940년에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오랫동안 북감리교 선교사로 일했다. 그는 미국 중서부의 고등교육기관에서 물리와 화학 등 자연과학을 공부한 인물로 그의 선교사역의 대부분은 교육사업과 관계가 깊었다. 그의 활동은 숭실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데 집중되었다. 그는 자연과학이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었으므로 과학을 잘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본연의 사명이자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기독교인들도 포함하는 고등교육기관에서의 사역을 염두에 두었다.
베커가 가진 이러한 생각은 평양에서 연합교파 사역으로 운영된 숭실전문학교에 대한 북장로교 선교부 측과의 차이로 나타났다. 베커를 중심으로 한 다른 북감리교 선교사들은 교육에 몸담은 인물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사무엘 모펫이나 윌리엄 베어드 등이 가진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인물양성이라는 교육철학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울의 북장로교 선교사인 H. G. 언더우드와 함께 서울에 연합대학을 세우는 안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간 연합대학 설립에 대한 연구는 주로 북장로교 선교부 내의 문제로 접근된 경향이 있는데 북감리교는 언더우드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베커와 같은 교육선교사들의 입장은 식민지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었기에 그의 생각과 활동은 이 시대 한국의 교육사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실제 해방 후 그의 제자들이 한국 과학계에서 중진으로 활동했다. 게다가 그의 가족들이 해방 후 한국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목차

1. 머리말
2. 아더 베커의 생애와 초기 평양에서의 활동
3. ‘연합기독교대학’ 설립 논란
4. 감리교 측의 논리와 베커의 서울에서의 활동
5.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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