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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동언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1집
발행연도
2008.12
수록면
331 - 35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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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수학하다가 1897년 신천 청계동에서 부친 안태현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안중근의 종제로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영향을 받아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안악면학회와 해서교육총회 회원으로 교육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안명근은 장차 독립전쟁을 위해 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배경진?원행섭?박만준?한순직 등 18명과 함께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안명근은 경성형무소에서 15년간 옥고를 치른 후 1924년 석방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7년 길림성 依蘭縣 八湖里에서 병으로 순국하였다.
일제는 한국강점 직후 식민지 무단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경계하였다. 특히 일제가 안악사건 등 3대사건을 조작하여 대대적으로 탄압한 이유는 서북지역에 대한 경계심과 반일 기독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경술국치 직전에 일어난 전명운?장인환의 스티븐스 처단의거(1908. 3), 안중근의 이등박문 처단의거(1909. 10)?이재명의 이완용 저격사건(1909. 12) 등은 모두 서북지역 인사들로 기독교 교인들이었다. 안악지방이 황해도의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서북지역으로 확대되자 이지역 인사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먼저 황해도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안악사건과 양기탁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국외이주와 무관학교 설립계획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안악사건과 동시에 양기탁사건?105인사건 등을 연계시켜 사건을 확대?날조하여 민족운동자들을 탄압하였다. 안악사건과 양기탁사건 조사 과정에서 신민회 조직이 발각되자 일제는 신민회라는 비밀결사조직이 일제총독 사내정의 암살을 기도하였다고 날조하여 105인사건으로 확대조작하여 평안도지역으로 대대적으로 탄압을 확대하였다. 특히 일제는 안명근사건을 ‘제2의 안의사 사건’으로 주목하고 탄압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제는 기독교계 반일세력의 배후로 외국인 선교사들을 지목하고 이들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신민회사건 등에 다수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배후세력으로 조작하였으나 기독교세력과 외국인 선교사들을 축출은 실패하고 오히려 일제의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식민통치의 실상을 전세계에 폭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출생과 안중근의거 이전의 활동
3. 안악사건의 전개과정
4. 출옥과 중국에서의 활동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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