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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희곤 (안동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3집
발행연도
2009.8
수록면
33 - 60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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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체제의 변화는 다양한 요인에서 출발한다.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삼은 조직으로서는 당연히 독립운동의 조건과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체제를 바꾸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도 건국 초기부터 광복 이후 환국에 이르기까지 상황과 여건의 변화에 따라 체제를 적절하게 바꾸어 갔다. 지도체제는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부분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령제로, 다시 국무위원제로 전환한 것도 그러한 여건 변화와 관련을 가졌다. 권력과 책임의 집중 현상을 막으려던 국무위원제는 임시정부 쇠약기를 넘길 방안으로 선택되어 13년이란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하여 비교적 정착된 상태가 되면서, 이를 개편하는 논의가 나타났다. 그 결실이 곧 주석제 채택이었다.
주석제에서 주석의 존재는 국가와 정부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는 1927년 제4차 헌법에 국무회의 주석이라고 등장하는 존재와 달랐다. 그때 주석은 일시적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존재였지만, 제5차 헌법의 주석은 최고 집권자요 통수권을 가졌다. 그래서 이를 ‘주석제’라고 부른다. 이는 우파 3당을 하나로 묶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든든한 체제를 확보한 김구가 확실한 지도력을 장악했음을 말해준다. 즉 주석을 맡은 그가 바로 黨(한국독립당)ㆍ政(임시정부)ㆍ軍(한국광복군) 체제의 최고 통수권자임을 의미한다.
주석제를 변화시킨 계기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요구로 나타났다. 조선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를 부인하다가 1941년부터 합류를 타진했다. 양당이 통합하여 단일당으로서 임시정부를 장악하려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요구를 한국독립당이 받아들이지 않아 합류 시점은 늦어졌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은 다시 합류 논의를 본격화시켰다. 먼저 군사합작으로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통합되었다. 이어 의정원의 의원수와 국무위원 수를 증원하는 가운데 좌우합작을 이루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다시 지분 확대를 요구했고, 이에 따라 합의한 내용이 바로 제6차 헌법으로 나타났다. 거기에서 채택된 지도체제가 주석ㆍ부주석제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택한 지도체제는 정부 조직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가는 기본 틀이었다. 정치 지형과 독립운동의 상황에 적절한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27년 권력을 분산시키면서 성립한 국무위원제가 혼란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기(1932~1939)를 버텨낸 체제였다면, 주석제 채택은 안정과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강력한 지도력이 요구되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또 주석ㆍ부주석제는 좌우 통합정부를 달성함에 따라 권력과 책임의 몫을 분담하려고 선택한 체제였다. 중경시기에 선택한 지도체제는 바로 그러한 정치와 독립운동의 지형에 적절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국무위원제의 한계
3. 주석제 채택과 권력집중
4. 민족혁명당의 합류와 지도체제 개편 요구
5. 주석ㆍ부주석제로 전환과 통합정부 구성
6.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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