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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원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40輯
발행연도
2011.7
수록면
9 - 43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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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류왕대는 隋의 멸망으로 분열된 중국을 唐이 재통일함으로써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수와의 전쟁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영류왕은 정치적으로 성숙한 장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왕위계승법인 장자상속이 아닌 형제상속으로 왕위에 오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卒本으로 始祖廟친사를 하였다. 영류왕은 이를 통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널리 확인 받고 이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지지기반을 발판으로 영류왕은 왕권 확립을 통한 강력한 고구려 건설의 움직임을 한 발 내딛게 되었다.
영류왕은 당시 일개 군웅세력이었던 당과 교류를 맺게 되었는데, 이는 문화적·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요해제족에 세력을 뻗어오는 동돌궐에 대한 견제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이 중원을 통일하고 동돌궐을 멸망시키면서 고구려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封域圖를 보내고 千里長城을 쌓으면서 이를 경계하고자 하였다. 이에 당이 고구려 경내에 무단으로 들어와 京觀을 파괴함으로써 고구려의 세력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교류를 중단하였다. 영류왕은 당과의 교류를 그만 둔 뒤에 신라에 대한 군사적인 공세와 말갈에 대한 패권 확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라에게 娘臂城을 빼앗기고 七重城공격에 실패함으로써 고구려는 동변과 남변의 안정화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당의 서역 정벌이 끝나가려 하자 영류왕은 서둘러서 세자를 사신으로 파견하며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영류왕의 저자세적인 외교 방식에 대한 불만은 당의 사신으로 職方郞中陳大德이 파견되자 더욱 고조되었다. 또한 영류왕의 계루부왕실 중심의 정국운영에서 도태된 귀족세력들의 불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왕실과 같이 성장해 온 연개소문 집안은 그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영류왕과 당시 집권층의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도태된 귀족세력과 대당 관계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세력과 결합하여 난을 일으켜 영류왕과 대신들을 살해하였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이 추구하였던 계루부 왕실 중심의 정국 하에서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영류왕의 동생인 대양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시조묘 親祠
Ⅲ. 영류왕의 對外政策
Ⅳ. 영류왕의 왕권강화와 政變
Ⅴ.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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