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만오 (전주대학교)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44집
발행연도
2011.9
수록면
199 - 233 (37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고는 조선시대 중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그들이 남긴 계보자료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필자는 조선시대의 중인은 조선초기 때부터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신분은 양반에 비하여 낮았다는 점과 양반과 중인은, 비록 성씨는 서로 같았어도 족보를 함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나라 최초로 발간된 족보로 알려진 『안동권씨성화보』나 또 그보다 90년 뒤에 출현한 『문화유씨가정보』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그리고 중인이 양반에 비해 그 지위가 낮았던 이유는 조선이 國是로 채택한 유교에서의 직업관이 반영된 결과로 파악하였다.
?;?;필자는 또 임진왜란 이후인 16세기나 17세기에 이르러서도 중인의 사회적 지위는 조선초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보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여전히 신분질서를 옹호하고 있었고 유교국가였으며 그 유교로 무장한 자들에 의해 통치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조선정부가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우|하여 채택한 방법이 양반층을 달래고 회유하는 쪽을 선택하였다는 점에서 중인의 지위는 나아질 수가 없었다. 그 결과 17세기에 편찬된 족보에 중인은 여전히 그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인의 사회적 지위는 그러나 英正祖 시대인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고 짐작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결과였는데, 중인의 정치적 지위가 성장함에 따라 그들의 사회 참여현상도 예전에 비해 크게 나아졌다. 또 그들의 의식도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곧바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인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였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중인보다 상위 계층인 양반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여야 하는데 양반들이 그러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인의 불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통청운동도 전개해 보는 등의 노력도 기울였지만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통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는데 19세기 중엽부터 중인들이 누구보다도 앞장 서 개화사상을 수용하게 된 이유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목차

참고문헌

참고문헌 (26)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3-911-001378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