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병준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선교와 신학 선교와 신학 제23집
발행연도
2009.2
수록면
213 - 245 (33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연구의 목적은 해방 이전의 한국 교회사 안에 나타난 교회ㆍ국가 관계의 다양한 구조적 변화를 살펴보고 그것이 한국 개신교 선교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는 것이다. 조선 사회는 주자학에 기초한 ‘종교 국가-종교 정치’ 유형의 정교 일치 사회였다. 조선 사회 안에 전래된 천주교회는 박해를 받으면서 ‘카타콤 유형’의 교회ㆍ국가 관계를 형성했다. 천주교회는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외세의 힘’ 에 의존하려 했고, 그것은 더 큰 박해를 가져왔으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화시켰다. 선교는 늘 물리적 힘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주의해야 한다.
개선교 선교는 열강들의 조선 침탈로 인해 조선 정부의 ‘종교 국가-종교 정치’ 구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종과 개화파 정치인들은 개신교회를 근대화의 수단으로 인식했고, 개신교회는 충군애국의 종교 이미지를 만들면서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독립협회 운동과 결합하여 정치적 변혁을 지향하게 되자, 정부는 교회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에 변화를 보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선교사들은 정교 분리를 선언하고 교회의 비정치화를 위해 노력했다. 정교 분리 선언은 정치적 위험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불충분했다.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면서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정교 분리의 본질적 취지를 가르치지 못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의 정교 분리 선언은 향후 한국 교회의 교회ㆍ국가 관계 이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한국 교회 안에는 내세 지향적 개인 구원형 신앙과 현실 참여적 민족 구원형 신앙이 구현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도 ‘종교 국가’인 일본은 모든 종교를 천황제 이데올로기 아래 종속시켰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일제와 선교사들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일제는 한국 교회를 통제하기 위해 선교사들에게 특혜를 주었으나 기독교 민족 운동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선교사에게 더 의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30년대 미일 관계의 악화, 신사참배 강요와 반대 등으로 인해 일제와 선교사들은 적대적이 되었다.
1938년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 이후,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적 타협과 친일의 길을 갔고, 오직 소수의 신앙인들만이 이교적 종교 국가의 박해를 견디는 카타콤 유형의 교회ㆍ국가 관계를 형성했다.
결론적으로 해방 이전 국가ㆍ교회 관계는 다양한 변화를 보여 주었다. 유교 국가 조선 안에서 천주교회의 카타콤 유형, 구한말 정부와 개신교회의 우호적 협력 관계, 신도 국가인 일본 통치 하에서 선교사들과 정부의 협력, 일제에 대한 기독교 민족 운동의 저항, 신사참배에 대한 교회의 굴복과 카타콤 유형이 나타났다.

목차

논문 초록
Ⅰ. 들어가는 말
Ⅱ. 초기 천주교회의 교회ㆍ국가 관계
Ⅲ. 구한말(舊韓末) 개신교회의 교회ㆍ국가 관계(1884-1910)
Ⅳ. 일제하 개신교회의 교회ㆍ국가 관계(1910-1945)
Ⅴ. 나오는 말
참고 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9)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3-235-001286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