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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38집
발행연도
2011.4
수록면
3 - 28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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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서』가라국전에 보이는 가야제국의 유일한 대중국 통교국이었던 가라국은 대가야가 아닌 금관국이 추진한 것으로 보았다. 加羅란 명칭도 대가야의 전유물이 아니라 김해에서 먼저 사용하였고 후에 고령이 답습하였다. 대가야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가야연맹체론과 남제통교는 시기적으로 거리가 있어 양자의 결부는 한계가 있다. 가라왕 하지에게 제수된 보국장군 외에 本國王이야말로 금관국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야제 국의 母體로서 금관국의 ‘本國’意識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금관국의 國記라고 추정되는 『本國本記』는 금관국의 뿌리와 왕통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사서라고 생각한다.
금관국의 대중통교의 목적은 송의 책봉체제에 들어가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송조의 권위를 이용하여 주변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장년에 걸쳐 송조와 통교했던 왜왕권으로부터 얻은 정보였다. 그러나 사절단이 도착할 때에는 이미 송조는 망하고 새로이 남제왕조가 들어섰다. 결과적으로 남제는 신왕조 개창의 축하사절로서 받아들였고, 미지의 왕국 금관국왕에게 보국장군본국왕을 제수하였다.
남제의 책봉체제에 들어간 금관국은 위기적인 현실 돌파를 꾀했지만, 신라의 군사력 앞에 남제측의 장군호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명목적인 장군호가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이상 남제통교는 무의미했다. 금관국의 대중통교는 단발성으로 끝나고 대중통교에 정보를 제공했던 왜왕권도 이후 1세기 이상의 공백을 보이게 된다.

목차

국문초록
1. 서언
2. 輔國將軍·本國王과 대가야연맹체론의 검토
3. ‘加羅‘와 金官國
4. 金官國의 ‘本國‘意議
5. 金官國의 국제환경과 對中通交
6. 결어
日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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