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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범환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33輯
발행연도
2012.4
수록면
179 - 214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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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 화랑도와 승려와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화랑도내에서 승려의 신분으로 활동한 그들은 ‘僧侶??徒’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화랑도내에서 지식을 전수하고 인재를 선발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선행 연구가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화랑도와 승려와의 관계를 다시금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몇 가지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 내었다.
우선 화랑도와 관련된 승려들의 기록을 다시 검토한 결과 기왕의 견해와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었다. 먼저 화랑도가 만들어진 다음 승려들이 자발적 으로 화랑도에 속하였는데 그 이유는 불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젊은이들에게 불교의 교리를 가르치기 보다는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함으로써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였고, 그것이 결국은 신라 사회에 불교를 퍼뜨릴 수 있는 바탕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승려들이 낭도들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불교의 기본적인 원리라든가 혹은 일상 생활속에서 불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하였다고 보아진다.
그렇지만 진평왕대부터는 도리어 화랑들이 주도하여 당시 명망 높은 승려들을 모셔와 낭도들 교육에 힘을 쏟았다. 특히 승려들 가운데서 중국에 유학하였거나 혹은 학문적 지식이 높은 이들을 초빙하였는데, 이는 그 무리를 이끄는 화랑이 다른 무리의 화랑도와 차별화하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신문왕대 화랑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효소왕대 화랑도가 새롭게 부활하면서 외형적으로는 화랑도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승려들도 당연히 화랑도내에서 활동하였다. 그렇지만 중대 말부터 화랑도에서 승려들이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더 이상 승려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지식의 전수와 관련하여 승려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國學의 발달과 짝하여 승려들은 화랑도내에서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또한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 치열한 왕위쟁탈전에 화랑도가 참여하게 되면서 승려들이 그러한 조직속에서 있게 되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으로 보아지는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화랑도와 관련된 기록에 보이는 승려
Ⅲ. 승려가 화랑도의 구성원이 된 배경
Ⅳ. 중대 말부터 화랑도 내에서 승려가 사라진 이유
Ⅴ. 신라 화랑도내에서 승려의 활동이 가지는 의미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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