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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문종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32집
발행연도
2012.3
수록면
249 - 273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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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조선전기 왜관의 설치배경과 변천과정, 직제, 기능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倭寇問題는 조선초기 대일외교의 주요한 현안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건국초부터 다양한 왜구대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1409년을 전후하여 왜구의 침입은 크게 줄어든반면 通交倭人이 점차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정부의 치안상의 혼란과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통교왜인을 통제하고 접대하는 장소인 客館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에는 東平館을, 지방의 三浦에는 浦所倭館을 설치하였다.
동평관은 1409년 한성의 남부 樂善坊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통교왜인은 상경하여 동평관에 머물렀다. 그러나 통교왜인의 上京道路가 임진왜란 때 침략루트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이들의 상경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上京倭人의 숙소였던 동평관도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고, 1617년경에는 건물이 없어지고 빈터만 남게 되었다. 한편 포소왜관의 설치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1418년부터 1423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 포소왜관은 조일관계의 전개과정에 따라 폐쇄와 복설을 반복하였지만 1547년 丁未約條이후부터는 부산포왜관 한 곳만이 임진왜란 때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전기의 왜관은 통교왜인의 숙박과 연향접대의 장소로서, 교역의 장소로서, 외교교섭의 장소로서,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관리 감독하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결과 조선전기의양국관계는몇 차례의변란으로 중단되기도했지만 다른 시기보다도 활발하고 우호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으며, 그 배경에는 왜관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왜관의 설치배경
3. 왜관의 설치와 변천
4. 왜관의 기능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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