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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정숙 (이화여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1집
발행연도
2012.4
수록면
275 - 316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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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팔렘방으로 동원된 조선인이 어떠한 귀환과정을 거치는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제 말기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먼 팔렘방까지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이 어떻게 해방을 맞이하며 이국땅에서 귀환을 준비하였는가를 구술, 회고록, 명부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보고자 하였다.
팔렘방은 수마트라 남부의 중심도시로서 유전을 끼고 있어서 연합군과 일본군의 이익이 가장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곳이었다. 일본이 패전한 시점 팔렘방에는 군‘위안부’ 및 ‘위안소’ 관계자, 군인 군속, 노동자(회사 원) 등 200~300명 정도 있었다.
일본 패전 이후 일본군은 군‘위안부’들을 임시간호부로 분식하였고, 조선인 남성들은 일본군이나 일본회사 등에서 놓여나 조선인들만의 단체인 팔렘방조선인회를 10월 18일 조직하였다. 식량 확보, 자위활동 등 자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진행되었다. 이후 포로감시원이 더해져 확대되었다. 팔렘방 조선인회는 현지 화교 등의 도움을 받아 임시정부 소식을 듣고 태극기를 그리며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그러나 팔렘방에 있던 조선인들이 모두 팔렘방조선인회로 모인 것은 아니었고 군‘위안부’ 중 일부는 임시간호부로서 일본군 그대로 편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해방의 소식을 듣고 자살 하거나 해방된 조국으로 가지 않고 현지에 잔류한 군‘위안부’ 피해자, 군속들도 있었다.
방조선인회는 팔렘방에서 싱가포르로 옮기게 된 1946년 2월 7일에 사실상 해체되었다. 팔렘방조선인회의 중심을 이루었던 포로감시원은 연합군에 의해 잔류당하였다. 그리고 싱가포르 주롱수용소로 이동한 이들은 그곳에 있던 싱가포르고려인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3·1 운동기념강연 등의 활동이 있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팔렘방에 있었던 이들은, 포로감시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1946년 5월과 6월 귀국하였다. 포로감시원들은 엄한 조사와 재판으로 64명 중 13명이 형을 받아 대부분 고국으로 귀향하지 못하였다. 형을 받지 않은 이들은 1946년 말, 1947년 고국으로 귀환하였다.
팔렘방으로 동원된 조선인들의 귀환과정은 귀환자체만이 아니라, 연합군·인도네시아인 독립운동조직·일본군 등의 힘의 대결이 이루어진 장이었으며, 우리 민족 내부에서도 군‘위안부’와 업자, 군인 군속, 노동자 등 성(젠더)과 계층성이 작동하며 다양한 삶과 생각이 노출된 장이었다.

목차

1. 머리말
2. 제2차 세계대전 종전기 인도네시아의 상황
3. 종전 직후 팔렘방 지역 조선인의 움직임
4. 싱가포르로 이동과 귀환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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