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3편의 저자가 처절하게 하느님을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시편 후반부의 의미를 전제한다면, 성전을 터전으로 살아야 할 시편 저자가 잠시 일탈했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 시달렸던 것 같다. 사제가 성소(聖召: 말씀)에 의존해서 살지 않았고, 성소(聖所)를 외면하면서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성전으로 돌아와서 하느님의 자애가 네온사인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성전 안에 산다는 것이 엄청난 행복임을 고백한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살다가, 곧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가 돌아와서 하느님을 찾는 시편 저자의 모습은 마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작은 아들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았지만 결국 자식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품꾼이라는 처지로 전락하는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이 가장 커다란 행복임을 깨달은 시편 저자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사제가 사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교회가 늘 부르짖었던 소리 였으나 오늘날에는 점점 사제가 사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니 사제를 필요로 하는데 찾아갈 사제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 마음껏 다가가지도 못한다. 사제가 하느님의 말씀에 의존하지도 못하고, 거룩한 성전 안에 머물지도 못한다면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사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어떻게 공동체라는 말을 다른 이들에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물론 어릴 때부터 형성된 성격과 여러 가지 마음의 상처들이 문제가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젊은 사제(보좌신부)들과 세 번씩이나 함께 살았던 경험을 통해, 사랑이 아니면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그 결과 고마운 마음이 앞서면서 그들이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함께 살았던 보좌신부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나에게 영성신학을 배웠던 세 명의 보좌신부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함께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다. 그래서 “사람은 법으로 통제할 수 없으며, 오직 사랑으로 본을 보여주는 것뿐이다’’라는 생각으로 함께 산다면 오적(五賊)이라는 말도,경계 대상의 목록이라는 말도 없을 텐데! 사제가 게으르거나 직무유기를 한다면 교회는 어찌되겠는가? 그리고 사제가 사제를 찾아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하는 질문이 요즈음 새삼 크게 와 닿는다. 자기 일(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제들끼리 사람의 일만 먼저 생각한다면 사탄(갈라지게 하는 사람) 밖에는 될 것이 없다(마르 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