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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보경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1집
발행연도
2012.4
수록면
31 - 79 (4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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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撰姓氏錄』은 平安京의 左京, 右京 및 幾內를 本貫으로 한 1182씨의 출자를 三體로 분류하여 계보관계를 정리한 계보총람이다. 桓武天皇이 延曆 18(799)년에 각 씨족에게 본계장의 제출의 명을 내리면서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16년 뒤인 嗟蛾天皇 弘仁 6(815)년 7월에 桓武의 아들인 萬多親王이 주축이 되어 완성을 보았다. 또한 편찬에 참여한 藤原緖嗣와 藤原園人 등도 桓武天皇의 측근으로 활약한 인물들이다. 그러한 만큼 『신찬성씨록』은 桓武朝의 관념이 투영된 산물이다.
桓武天皇은 이른바 ‘天智系皇統’을 실질적으로 부활시킨 인물로,奈良시대를 통해 계속적으로 이행된 天武國忌日의 廢務를 행하지 않았고, 昭穆制의 도입을 통해 光仁天皇을 태조나 고조에 비정하며 交野의 柏原에서 제사지냈으며, 천무계 황통의 도읍지였던 奈良의 平城京을 떠나 山城 지역으로 도읍 자체를 옮겼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환무천황이 奈良시대를 통해 뿌리내린 ‘天武重視’ 의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구축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신찬성씨록』의 서문에 일본의 씨성제 확립에 하나의 획을 그은 ‘천무팔성’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또한 『신찬성씨록』이 편찬된 시기인 8세기말 9세기에는 이미 신분이 높고 세력 있는 도래계씨족은 사회적인 지위를 확립하고 귀족의 반열에 오른 존재로 공인되어 있었다. 따라서 황별, 신별, 제번이라는 분류가 그대로 일본의 ‘토착과 도래’의 여부를 구별하는 근거가 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신찬성씨록』은 ‘皇別, 神別, 諸蕃’을 기준으로 삼아 계보 관계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諸國만이 아니라 唐까지도 제번에 포함시켜 제번의 외연을 확장하였다.
이것은 唐과 한반도 제국을 제번이라 규정하고, 제번을 황별, 신별 아래에 배열함으로써 『신찬성씨록』의 세계를 통해 천황 중심, 일본 중심의 번국관을 완성시키고자 시도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주변 제국을 번국으로 지배하는 강력한 신왕조의 창시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자 한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신찬성씨록』의 구성과 내용
3. 『신찬성씨록』의 편찬 과정
4. 『신찬성씨록』의 편찬 목적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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