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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민덕기 (청주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1집
발행연도
2012.4
수록면
155 - 182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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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에 대비하여 10만의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그동안 웬일인지 임진왜란용으로만 치부되어져 왔다. 만약 이이가 실제로 십만양병설을 제기했다면 그것은 남쪽의 왜적이 아니라 북쪽의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 당시 일본은 전국 통일을 눈앞에 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사망한 직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안개 정국이었던 때였다. 또한 당시 조선이 의식한 일본으로부터의 위협은 을묘왜변 정도의 수준이었지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할 위기로 인식되지 않았었다.
반면 조선의 동북방 지역에서는 여진족 니탕개(尼湯介)의 난이 일어나 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각 도에서 정예 병사를 뽑아 동북방으로 속속 파견해야 했으며, 임금이 사찰의 종까지 거둬들여 무기인 統筒을 만들라고 지시했을 정도로 니탕개의 난은 조선 조정에 큰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니탕개의 난은 여진족 3만여 騎가 참여하여 六鎭지 역을 휩쓸고 다녔을 정도였다. 십만 양병설이 사실이라면 일본용이 아니 라 동북방 여진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1580년대의 니탕개의 난으로 촉발된 동북방의 제반문제를 삼켜버렸다고 할 수 있다. 율곡이 그토록 고심하던 동북방 문제는 임진왜란의 발발로 對日用 십만양병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기존연구에서의 십만양병설 否定논리
3. 병조판서 율곡이 처한 대외적 상황
4. 율곡의 지향한 軍政개혁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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