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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희곤 (안동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5권 제1호
발행연도
2012.5
수록면
467 - 496 (30page)
DOI
10.17068/lhc.2012.05.15.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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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는 1919년 3ㆍ1운동을 기준으로 앞뒤로 나뉜다. 이 가운데 안동 가일마을 사람들이 펼친 항일투쟁은 후반기인 1920~1930년대에 집중되었다. 1910년대에 광복회에 참가하여 전반기에 활동한 일은 있지만, 실제로 투쟁의 중심은 1920년대 농민ㆍ노동ㆍ청년운동 등 사회운동에 몰려 있었다.
권오설은 가일사람들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그가 가일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항일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3ㆍ1운동에 참여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농민운동ㆍ노동운동ㆍ청년운동을 시작하고, 풍산소작인회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활동을 디딤돌로 삼아 그는 서울의 사회운동 무대로 진출하였다. 그 뒤를 따라 가일마을 청년들이 줄을 이어 서울로 갔다. 권오설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노동ㆍ농민운동을 이끌어 가던 그 길에 가일마을 청년들이 바싹 뒤를 좇았다. 특히 6ㆍ10만세운동은 권오설이 기획하고 그를 따르던 가일마을 청년들을 비롯한 ‘안동그룹’의 기여도가 높았다. 그 바람에 가일 청년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학교를 중퇴하고 귀향하였다. 돌아온 자들은 권오상ㆍ권오운처럼 옥고로 말미암아 신음 끝에 요절하기도 하고, 농민ㆍ노동운동을 지속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그의 영향으로 모스크바로 갔던 권오직은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익히고 돌아와 투쟁노선을 걷기도 했다. 또 권영달처럼 언어민족주의 운동을 펼쳐 겨레말을 지켜나가던 인물도 나왔다.
가일마을 사람들이 펼친 항일투쟁은 독립운동의 후반기에 집중되었고, 특히 농민운동을 축으로 삼는 사회운동에 집중되었다. 여기에다가 해방 이후 남북분단이 나타나면서 권오직을 비롯해 많은 인물이 월북함에 따라 ‘안동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이 나타났던 것이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광복회 참여와 항일투쟁의 발단
3. 권오설의 등장과 사회운동의 시작
4. 6ㆍ10만세운동의 기획과 기여
5. 사회운동의 전개
6.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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