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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현정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70號
발행연도
2011.6
수록면
125 - 15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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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5·16세기 조선 백자에 보이는 명대 자기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국내·외 도자관련 문헌기록과 유적 출토품을 분석하여 유입된 명대 자기의 양상을 고찰하였다. 둘째, 조선 백자와 명대 자기의 양식을 비교 분석하여, 조선 백자에 보이는 명대 자기의 요소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셋째, 이를 종합하여 세 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마다 조선 백자가 명대 자기 양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변화시켜 가는지 그 수용 양상을 살펴보았다.
1기(1392-1450년경)는 명대 자기의 공식적인 유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조선 백자의 발, 병의 기형에서 원대 자기의 영향을 받은 고려의 전통이 지속되면서도, 새로운 명대 자기의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2기(1450-1500년경)에는 발, 병을 비롯해서 호, 뚜껑의 기형과 화당초문, 운룡문, 문자문, 칠보문, 변형운문 등에서 명대 자기의 양식이 수용되었다. 그런데 2기에 수용된 양식은 변형운문 외에 대부분 1기에 유입된 영락·선덕·정통연간의 양식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의 경우 양질의 백자와 청화백자가 제작되고, 관요가 설립되는 등 제도적으로도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던 시기인 반면, 명의 경우 정치적·경제적 혼란기였던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곧 조선은 본격적으로 백자와 청화백자를 생산하는 시기였지만, 더 이상 명대 자기의 공식적인 유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1기에 다량 유입되었던 명대 자기의 양식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조선 백자의 수용태도에도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2기 후반기가 되면 사무역을 통해 새로운 명대 자기가 유입되는데, 그 영향은 보조문양인 변형운문에서만 보인다. 곧 조선 백자가 명대 자기의 양식을 무조건적이 아닌 선택하여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명대 자기의 요소가 보이는 백자와는 별도로 양이잔, 전접시, 편병, 연적, 구연이 외반하여 말린 입호, 원호 등의 기형과 시문, 회화적인 송죽매 계열 등의 문양이 시문된 조선 백자가 다수 제작되고 있었음은 이를 또한 반증해 준다. 3기(1500-1592년경)에는 조선백자가 2기에 수용한 명대 양식을 조선적으로 변화시키며 발전하고 있었으며, 이와 함께 병과 접시, 문자문, 내저면의 청화원권 등 일부 기형과 문양에서 16세기에 유입된 명대 자기 양식을 수용하였다.
이상의 연구에서, 조선 백자는 각 시기마다 명대 자기의 영향을 받았지만, 주체적인 입장에서 조선의 미감에 맞게 명대 자기 양식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적인 특징을 지니며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명대 자기의 유입 현황
Ⅲ. 조선 백자와 명대 자기의 양식비교
Ⅳ. 15-16세기 조선 관요 백자의 명대 자기 수용양상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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