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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남의현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2집
발행연도
2012.8
수록면
81 - 11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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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末明初 明나라는 鐵嶺衛 설치시도, 공로폐쇄, 두만강 유역 10處 여진인 회유, 奴兒干都司의 설치, 遼東八站으로의 진출 등 강역을 확대하기 위한 많은 조치를 취하였다. 중국은 이러한 명초의 시도들을 통해 압록강과 두만강이 조선과의 국경선이 되었고 광활한 여진지역이 명나라의 관할지역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말명초 『明實錄』과 『朝鮮王朝實錄』등 양국의 관련 사료를 살펴보면 이러한 중국의 주장과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원대에는 遼陽行省이 설치되었고 수많은 고려인들이 요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압록강과 두만강은 고려와 몽골의 경계가 될 수 없었다.
고려 공민왕은 몽골의 쇠퇴와 더불어 遼陽과 우라山城 지역을 공략하여 요동을 잠시 고려의 영향력 하에 두기도 하였다. 명나라는 건국 후 철령위 설치를 시도하며 압록강에 명군을 주둔시키고자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요동 북부 鐵嶺(지금의 철령시)으로 衛를 이전하여 압록강은 명과 고려(조선)의 국경선이 될 수 없었다. 또한 명나라는 공로폐쇄를 통해 고려의 요동진출을 금지하고 북원과의 연합을 차단하였으나 압록강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永樂年間에는 두만강 유역의 10處 여진인을 명의 관할로 만들고자 시도하였으나 여진인의 저항과 조선의 외교적 노력에 막혀 역시 좌절되었다. 나아가 당시 두만강 유역은 조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고, 조선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문제를 중요한 현안으로 삼고 지속적으로 초무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10처 여진인과 알타리부를 이끌고 가던 지도자 맹가첩목아를 조선의 영향력 하에 둘 수 있었다. 명나라는 결국 압록강 유역에 군사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압록강 대안 180리에 해당하는 압록강~연산관 지역은 국경지대로 남게 되었다. 이 국경지대는 조선과 명이 국경을 선으로 획정할 수 없으며, 지역 곧 면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이 주장하는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압록강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나아가 高麗와 朝鮮의 국경 인식에는 늘 公?鎭이 세계관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 공험진과 선춘령비의 위치를 정확하게 추적하지 못하고 있지만 명나라 역시 건국초기부터 공험진 이남은 고려와 조선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조선 역시 여진족들과 경계를 논하거나 강역의 귀속문제를 논할 때 이 공험진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근거가 되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공험진과 선춘령 자체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 남쪽에 있는 백두산은 당연히 조선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고 결국 두만강과 백두산 변경의 문제는 조선과 여진사이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두만강이 명과 조선의 국경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正統年間(1436~1449) 이후 建州女眞을 비롯한 여진세력은 李滿住 · 董山 등이 중심이 되어 遼東都司 동부 지역을 공격하고 역으로 조선과 명의 협공을 받는 등 전쟁과 갈등의 양상을 만들어 냈다. 명나라는 東州堡 · 馬根單堡 · 淸河堡 등 변장을 수축 정비하며 국경선에 해당하는 요동변장 방어선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장 수축사업은 결국 여진지역이 명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임을 자인하는 중요한 증거로 볼 수 있다. 조선 역시 4군6진을 개척하지만 여진지역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종합해보면 현재 중국이 주장하고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설, 그리고 백두산이 명의 관할이라는 것, 명대 여진지역이 명나라의 판도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명의 遼東貢路 폐쇄와 고려·조선과의 갈등
3. 鐵嶺衛 설치 좌절과 조선의 압록강 유역 관할
4. 명의 10處 여진관할권 상실과 변경지대의 변화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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