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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성주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2집
발행연도
2012.8
수록면
149 - 18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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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부터 북방의 경계를 두만강과 압록강으로 하였다는 인식이 있었던 반면 조선의 영역은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이라는 인식이 있어 왔다. 따라서 조선은 얼마든지 두만강이라는 경계를 넘어 그 지역에 5진과 같은 鎭을 설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고에서 살펴보는 明宗대 伊應巨島(또는 仍巨島)의 子母鎭 설치는 조선의 영역인식과 관련되어 실행된 사례이다.
이응거도는 慶興鎭에서 북쪽으로 10~20리 떨어진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섬[島]이었고, 여진 중에서도 骨幹兀賊哈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조선에서 이곳에 자모진을 설치하였는데, 그 이유는 경흥진 주변이 잦은 수해를 입어 전답이 상실되고 백성들이 계속 굶주림에 시달리는 등 피해가 컸고, 이응거도에 경작할 만한 땅이 있어서였다. 즉 이응거도의 要路에 진을 설치하여 방어를 하면서, 섬을 개간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자모진의 설치 시기는 1551년(명종 6)12월 이전으로, 함경북도병사 金舜皐와 경흥부사 金秀文이 주도하였다. 그렇지만 임시적인 목책에 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石城을 쌓고 館舍까지 지은 것이 보고되면서 ‘鎭’ 설치의 便不에 대한 논란을 촉발시켰다. 鎭 설치를 반대한 사람들의 이유는 이응거도의 여진인들을 내쫓으면 결국 땅을 다투게 되어 여진과의 분쟁[?端]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鎭 설치는 승인되었지만, 1552년(명종 7) 7월에 일어난 골간올적합의 西水羅堡 침입으로 조선인 80여 명이 사로잡혀 갔다. 이 침입은 이응거도에 진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고되었고, 자모진 설치가 잘못되었다는 의논이 일어나서 진이 폐기되었다. 또한 여진의 침입에 대한 보복으로 草串 征討에 대한 의논이 일어났다. 여진에 대한 보복 정벌 역시 잘못이라는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1554년(명종 9) 1월 초관 정토는 감행되어 여진인 59명을 참획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초관 정토 후 4개월이 지난 1554년 5월 여진인들은 다시 침입하여 造山堡가 함락 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여진의 조산보 침입은 조선의 초관 정토시에 도망하였던 골간올적합 詩羅孫이 원근의 여진인들을 유인하여 일으킨 것이엇다. 결국 조산보 침입의 주모자인 시라손이 조선에 항복하여 옴으로써 이응거도의 자모진 설치에서 비롯된 여진의 서수라보 침입, 그에 대한 조선의 초관 정토와 여진의 조산보 재침입으로 이어진 여진과의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伊應巨島의 위치와 子母鎭의 설치 배경
3. 子母鎭의 설치 시기 및 便不에 대한 논란
4. 여진의 西水羅堡 침입과 조선의 草串 征討
5. 여진의 조산보 침입과 ‘鎭‘ 설치에 대한 평가
6.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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