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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동규 (동아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2집
발행연도
2012.8
수록면
267 - 304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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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전근대 시기에 한정해 중국과 일본이 釣魚島諸島에 대해서 어떠한 영토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고찰한 것으로 그 요점을 두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明代에 류큐로 파견된 책봉사들의 기록들로부터 조어도제도가 중국영토로서의 인식이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1543년 陳侃의 『使琉球錄』과 1562년 郭汝霖의 『重編使琉球錄』에 의하면, 姑米山(현 久米島)은 류큐(琉球)에 속하고, 조어도제도의 동쪽 끝에 위치한 赤嶼(현 大正島)는 류큐와 경계가 된다는 기록이 보이고 잇다. 즉, 조어도제도 8개의 섬 중에서 제일 동쪽에 있는 赤嶼가 류쿠의 경계라는 인식은 조어도제도가 중국 측의 영토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明代의 해상방어책을 서술한 鄭若會의 『鄭開陽雜著』에 기재된「福建界」를 보더라도 조어도제도가 포함되어 있어 조어도제도에 대한 영토인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淸代에 들어와서도 明代의 조어도제도 인식, 즉 赤嶼와 姑米山 사이를 국경으로서 보는 영토인식이 더욱더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1683년 책봉사였던 汪楫의『使琉球雜錄』을 보면, 赤嶼(다이쇼지마)와 姑米山(쿠메지마)사이에 “郊(또는 溝)’라는 곳을 중국과 류큐의 경계로서 인식하고 있었고, 또 1719년 책봉사절의 일원이었던 徐?光는 현재의 쿠메지마가 류큐의 서남단 마지막 영토라는 인식을 가지고 『中山傳信錄』에서 姑米山에 대한 附記로 “류큐의 서남쪽 방면 경계의 鎭山”이라고 한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서 전근대 시기의 조어도는 ‘無主의 땅’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영토문제로서 조어도제도에 대한 선점권은 이미 전근대 시기에 중국이 먼저 확보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明代의 釣魚島諸島 인식
3. 淸代의 釣魚島諸島 인식
5.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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