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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엄찬호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2집
발행연도
2012.8
수록면
305 - 342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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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간에 구체적 경계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양국간의 경계는 선으로서의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공간을 완충지대로 하는 경계지대로서 존재하였다.
조선후기 들어 양국간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범월문제가 대두되어 보다 구체적인 경계선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양국은 기존의 인식을 바탕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국경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가면서 완충지대로서의 경계지대가 없어지고 국경선으로서의 경계선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국경선으로서 설립된 백두산 정계비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 둘째는 목극등이 토문강의 상류라고 생각하여 정계비를 두기로 한 곳이 어느 강의 상류인가 하는 문제였다. 양국간에는 이 문제에 대한 교정 없이 정계비 설치를 마무리함에 따라 정계비는 국경선의 기점으로서 역할 보다 또다른 국경분쟁의 요소로서 조·중간 국경분쟁의 상징물이 되었다.
조선 말 양국은 봉금지역을 해제하면서 그동안 무인재지대로 남아있던 경계지역의 간척문제로 다시 대립하게 되었고, 이 문제는 새로운 국경분쟁을 야기시켜 회담을 진행하였지만, 정계비 설정으로 인해 발생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국경회담은 실패하였다.
그 후 조선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됨으로써 영토 주권을 상실하여 중국과의 국경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조 · 중간 경계지대의 형성
3. 국경의 형성과 고지도
4. 국경조약회담
5. 결론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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