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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고정휴 (포항공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2집
발행연도
2012.8
수록면
207 - 243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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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3·1운동 이후부터 해방 이전까지 미국 내의 주요 신문들, 특히 『뉴욕 타임스』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인식과 보도 태도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검토를 통하여 우리는 한국 독립운동기에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과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뉴욕 타임스』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직접 관련된 기사들은 3·1운동기(1919~1921)에 16건, ‘만주사변’(1931)을 전후한 시기에 6건, 태평양전쟁기(1941~1945)에 25건이며, 1922·1924·1940년에 각각 1건이 나온다. 이를 모두 합하면 총 50건이다. 미국 내의 다른 주요 신문들, 예컨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도 양적인 측면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보도 기사는 『뉴욕 타임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 신문의 임시정부에 대한 보도 내용―즉 임시정부의 조직이나 활동에 대한 소개― 또한 대체로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3·1운동기에는 중국 상해와 북경, 그리고 미국 내 한인운동의 거점이었던 샌프란시스코와 워싱턴 D.C. 등지에서 입수된 소식들을 특별한 논평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데 치중했다. 여기에는 각 신문사들이 ‘뉴스(news)’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다는 사정 외에도 한국임시정부 수립이 갖는 정치적 민감성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국문제’를 일본의 ‘내정문제’로 간주했다.
이러한 미국 언론의 보도 태도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달라진다. 대일전쟁 수행에서 한국독립운동세력들이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일본의 패전 후 한국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미국 언론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전쟁 발발 초기, 미국 내 신문들은 한국과 한국민이 아시아에서 확장일로에 있던 일본의 침략전쟁에 맞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선언을 계기로 전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존재는 더 이상 미국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시기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이 약화된 요인으로는, (1) 국내 민중들과의 접촉 부재, (2) 임정 내부의 ‘분열’과 광복군의 확대사업 부진, (3) ‘망명정부’로서의 법적 근거의 부족 등이 지적될 수 있다.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지면서 미국 언론은 임시정부의 ‘대표성’에 대하여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 이는 결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목차

1. 머리말
2. 『뉴욕 타임스』의 한국관계 기사 분석
3.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시기별 인식 변화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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