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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成制 (東北亞歷史財團)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68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35 - 66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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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梁書』 高句驪傳의 396년 후연이 고구려 광개토왕을 책봉한 기록이 양국이 冊封朝貢關係를 맺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그 배경과 새로운 관계의 내용에 대해 살핀 것이다.
당시 후연은 北魏와의 대결에서 守勢에 몰리고 있었기에, 이때의 책봉은 북위의 공세에 대비한 대책의 일환이었다. 후연은 책봉을 내세운 對高句麗外交로서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보아 후연의 책봉에 대해 고구려가 화답하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의 개선은 무망하였다. 따라서 이 기사는 양국이 책봉조공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양국 관계의 개선이 소망스럽기는 고구려도 매 한가지였다. 남방의 百濟를 상대하기 위해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기에 후연과의 적대적 관계가 계속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후연의 책봉에 후속하여 광개토왕이 幕僚를 두었다는 것은 후연의 책봉이 그 전제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광개토왕은 후연의 책봉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후연의 광개토왕 책봉은 고구려가 遼東을 차지하고 있다는 현실을 후연이 인정하는 조치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양서』의 책봉 기록은 후연이 수여한 책봉 내용을 모두 전하는 것이 아니라 前 왕조인 前燕이 수여한 책봉을 전제로 바뀐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책봉의 변화 내용을 분석한 결과, 후연이 고구려의 요동 영유를 인정하였다면 당연히 들어가 있어야 하는 遼河 以東의 지역 즉 ‘平州’의 관할권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요동 영유는 후연이 요동과 玄?2郡을 고구려에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서 고구려가 후연을 몰아냈다거나 후연의 전력이 약해졌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도리어 平郭과 요동을 거점으로 군사력을 강화한 후연의 東方政策은 후연이 붕괴하던 시점까지 유지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요동 지역은 양국이 分點하고 있었고, 양국의 책봉조공관계는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요동 지역의 분점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사료가 바로 〈廣開土王陵碑〉 永樂 5年條라고 본다. 광개토왕이 巡行한 경로 상에 마땅히 지나쳐야 했을 평곽과 요동이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광개토왕은 후연과의 관계가 개선된 뒤, 백제 공략에 나서서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 고구려가 396년 후연과의 관계에서 이룬 책봉조공관계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高句麗의 遼東 領有說에 대한 재검토
Ⅲ. 遼東 지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와 後燕의 廣開土王 冊封
Ⅳ. 高句麗와 後燕의 冊封朝貢關係와 그 意味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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