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선혜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35輯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287 - 323 (37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연구는 연산군 시대 先王 世祖와 成宗의 전승을 놓고 일어난 연산군과 三司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그들이 지향한 정치운영방식의 차이를 중심으로 검토한 글이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대간과 홍문관은 물론 유생들까지도 참여하여 성종 후반기 이래 정립된 공론정치를 강조하였다. 三司는 성종을 ‘내 임금’(吾君)이라 하며 연산군에게 공론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던 성종의 成憲을 강조하였다. 이와 달리 연산군은 세조를 성헌으로 내세우며 전제적 왕권을 추구한 그의 정책을 지향하였고, 이에 대해 삼사는 과격한 언사와 직접적 표현을 사용하여 적극 반대하였다.
연산군은 삼사의 이와 같은 언행을 국왕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까닭은 삼사가 성종을 근거로 전개한 주장은 연산군이 운영해 가는 정국의 방향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삼사가 공격한 핵심에는 연산군이 지향하는 정치운영 방식에 대한 부정이 담겨있었다. 따라서 연산군은 삼사의 언행을 국왕의 정치운영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연산군은 세조를 헐뜯고 잘못된 기록을 史冊에 남겼다는 이유로 많은 臺諫과 史官을 제거하는 극단적 조처를 감행하였다. 사화를 통해 연산군이 공격한 핵심에는 삼사와 유생이 내세우던‘성종의 성헌’으로 상징되는 공론정치 이념이 한자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한 충돌을 빚으면서 연산군이 세우고자 한 세조의 전승은 전제정치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세조를 끌어들여 전제적으로 왕권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조선왕조의 틀 안에서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의 정치는 삼사는 물론 유생들과 지방의 사림까지도 도덕적 가치관을 크게 강조하며 공론정치를 지향하는 흐름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 서 있던 연산군이 아무리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해도 조선의 정치가 전제정치를 지향하며 보다 비유교적이며 簒位라는 도덕적 결함마저 안고 있던 세조대를 지향할 수는 없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세조 전승과 갈등 : 成憲과 失禮
3. 성종 존숭을 둘러싼 충돌 : 吾君과 今上
4. 세조 · 성종의 전승과 그 역사적 의의 : 專制政治와 公論政治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6)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4-001-000539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