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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화 (중앙민족대학)
저널정보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 통일인문학논총 제54집
발행연도
2012.11
수록면
231 - 256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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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일제 침략기 중국 대륙을 무대로 활동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각급 군관학교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중견간부로 성장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한인 독립운동 진영이 중국 군관학교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초반이었지만, 192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한인의 중국 군벌정권 군사학교 입교가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손문(孫文)의 광동정부(廣東政府)와 당계요(唐繼堯)의 운남군벌(雲南軍閥)은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입장을 표명하였고, 운남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는 상당수의 한인이 입교하였다. 이와 함께 낙양군벌(洛陽軍閥) 오패부(吳佩孚)의 낙양강무학교(洛陽講武學校)에도 다수의 한인이 입교하였다.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의 성립과 국민혁명의 전개라는 중국의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재중 한인 독립운동의 진로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황포군관학교(黃?軍官學校)의 설립이었다. 한인 혁명가들은 보다 효율적인 독립운동 노선과 방략을 모색하기 위해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선택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입교에는 의열단(義烈團)뿐 아니라 임정중심 세력 및 만주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적극 참여하였다.
중국 군벌정권 군사학교와 황포군관학교를 매개로 한 기반 조성 작업은 일제의 동북침략을 계기로 중국 육군군관학교 내에 ‘한인특별반’의 설치ㆍ운영이라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시작된 ‘9ㆍ18사변’과 이듬해 초의 이봉창ㆍ윤봉길 의거는 중국민의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킴과 동시에,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강화시켰다.
중국 정부는 한인들의 항일투쟁 역량을 중국의 항일전쟁 역량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중국 정부의 재정적ㆍ군사적 지원하에 시행된 김원봉의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와 김구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운영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뒤이어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 이후에는 중국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와 강릉분교(江陵分校)에서도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여 이들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대원으로 성장하였고, 1940년대에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대원으로 발전하였다.
이렇듯, 중ㆍ한 양 민족은 일제 침략이라는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동항일의 중ㆍ한 연대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국제정치의 중심이 동북아시아로 옮아오고 있는 지금, 일제침략기 ‘공동항일’을 기치로 내걸었던 중ㆍ한 국제연대의 현장이었던 중국군관학교가 갖는 의미 또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고 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중국 군벌정권 군사학교의 입교 경위와 입교 상황
3. 황포군관학교의 입교 경위와 입교 상황
4.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입교 경위와 입교 상황
5.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입교 경위와 입교 상황
6. 중국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 특별반의 입교 경위와 입교 상황
7.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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