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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문기 (부경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85집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323 - 367 (45page)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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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교역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 동안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곡물의 교역이 활발했다. 전근대시대에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곡물유통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다. 곡물교역 논의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대기근의 시기와 일치한다. 이런 사실은 중국과 조선의 곡물유통이 소빙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곡물 유통의 관계망은 변화했다.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계갑대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은 중강개시를 열어 명의 곡물을 유입했다. 여진이 성장하자 조선은 여진에 일방적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1644년 청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 조선은 막대한 곡물을 운송하여 청의 안정적 통치에 일조했다. 청이 강남을 점령한 이후에는 더 이상 조선의 곡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17세기 후반 조선은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을병대기근(1695~1699)을 겪었다. 경신대기근 동안 조선은 절대적인 곡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청에 곡물을 요청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을병대기근 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청은 총 5만 석의 곡물을 보내 교역하게 함으로써 조선의 기근을 해결하게 했다. 청에 대한 ‘復讐雪恥’를 꿈꾸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17세기 전반 중국이 극심한 기근을 경험하면서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 조선은 청에 곡물을 공급하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그렇지만 17세기 후반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조선은 1백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기근을 두 차례나 겪었다. 이에 반해 청은 경제적 안정을 통해 조선에 대량의 곡물을 공급했다. 소빙기에 대한 중국과 조선의 적응이 서로 상반되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전쟁과 곡물교역: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까지
Ⅲ. 숭정 13~15년의 奇荒과 곡물유출
Ⅳ. 경신대기근과 청국 곡물 수입 논의
Ⅴ. 을병대기근과 강희제의 海運賑濟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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