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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高光儀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45輯
발행연도
2013.3
수록면
55 - 75 (2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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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安高句麗碑〉의 형태는 중원의 圭首碑 양식을 채용하였지만 墓碑의 전통적인 용도보다는 또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 단순히 추모와 송덕이 아닌 왕실의 현안 문제 해결을 위한 守墓制度의 개선책을 공포하는 기재물로 활용되었다. 용도가 守墓敎令碑로 변용되었다는 점에서 비록 형태는 중원의 양식을 수용했지만 고구려화 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집안고구려비〉가 세워질 당시 중원 지역에서는 漢末 이래 禁碑令이 내려지고, 특히 〈廣開土太王碑〉가 건립되는 東晋 말기에는 재차 강화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祖先王의 능묘에 대대적인 묘비를 세우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어 대비된다. 중원의 금비령이 고구려까지는 미치지 못하였고 특히 광개토태왕대에 고구려에서 자주적인 입비정책이 시행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집안고구려비〉는 隸書에서 楷書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서체인 일종의 ‘新隸體’라고 할 수 있다. 신예체는 漢魏晉 시대에 폭넓게 사용된 서체로서 중원과 고구려의 서체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보여준다. 〈집안고구려비〉의 발견을 통해 고구려에서도 이미 隸書의 발전 단계를 지나 楷書로의 서체 변천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廣開土太王碑體’에 나타난 독특한 서체 풍격은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서체 변천에서 고구려의 독창적인 선택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高句麗의 石刻 유풍
Ⅲ. 集安高句麗碑의 形態와 의의
Ⅳ. 集安高句麗碑의 書體 변천사적 위치
Ⅴ. 맺음말
〈참고문헌〉
〈中文提要〉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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