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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덕주 (감리교신학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0호
발행연도
2014.3
수록면
147 - 190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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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역사에서 ‘대표적인’ 순교자로 기록되고 있는 손양원 목사는 경남 함안에서 장로교 신앙과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손종일 장로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21년 일본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스가모중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일본 동양선교회 창설자 나카다,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등으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고 복음 전도자로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귀국해서 경남노회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 나환자교회인 부산 상애원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으며 경남노회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38년 졸업한 후 나환자교회인 여수 애양원교회의 초빙을 받고 나환자 목회에 임하였다.
일제말기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손양원 목사는 신사참배를 강하게 비판, 거부하였고 그 때문에 1940년 9월 체포되어 1945년 해방되기까지 5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 여수 애양원교회에 복귀하여 목회하면서 부흥사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한국 교회와 민족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1948년 ‘여순사건’ 사건이 터졌을 때 순천에서 유학 중이던 두 아들이 공산주의 학생들에게 희생되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가해자 학생을 용서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아 그로 인해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이 그에게 붙여졌다. 다시 2년 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환자 교인들을 버려두고 갈 수 없다”며 애양원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1950년 9월 28일 여수에서 희생되었다.
나환자 목회로 출발하여 일제말기 신사참배 거부투쟁과 투옥, 그리고 해방 후 부흥사역과 순교에 이르는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신학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1) 성경 절대주의, 2) 종말론적 소명감, 3) 대속적 자기희생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30여년 나환자 목회를 통해 ‘자기 비움’과 겸비를 경험, 실천하였고 성경중심적 복음주의 신앙과 종말론적 재림신앙에 입각하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였으며 해방 후 민족분단과 좌우익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두 아들을 잃고도 가해자(원수)를 용서하는 ‘완전사랑’의 본을 보였고 전쟁 중에도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목자’의 자리를 지키다가 순교자가 되었다. 결국 손양원 목사는 평소 목회자로서 자기 비움과 희생을 실천하는 ‘백색 순교’의 삶을 살다가 결국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로 생을 마쳤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순교신앙의 형성배경
Ⅲ. 순교신앙의 형성과정
Ⅳ. 목회 영성과 순교 신학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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