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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허인욱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13호
발행연도
2014.3
수록면
1 - 42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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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탑은 신라 善德女王14년 3월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같은 왕15년에 初成되었다. 그 이후 고려시대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훼손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황룡사탑이 처음 훼손을 입은 것은 聖德王17년 8월이었다. 원인은 벼락으로 인한 화재 발생이었다. 이때의 손상은 성덕왕 19년에 가서 복구되었다. 이후 文聖王代에 와서는 지반 불안정으로 인해 탑이 기울어졌는데, 수리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景文王8년에 낙뢰로 인해 다시 심각한 피해를 입자, 경문왕 11년 정월에 개조명령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다. 이 개조 작업은 같은 해 8월 12일에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 경문왕 13년 9월에 가서 끝을 맺었다. 당시 경문왕이 황룡사탑 개조작업을 벌인 것은 황룡사탑이 갖는 호국이라는 의미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신라 말인 景哀王4년에 북쪽으로 기울어지는 피해가 다시 있었으나, 왕이 살해당하는 등의 혼란한 상황이어서 탑을 복구할 정도의 여력은 그리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光宗4년에 낙뢰에 인한 화재가 일어 전소된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이때 입은 피해는 穆宗7년에 가서 재건되었다. 현종대에 가서는 3년과 12년에 2차례 수리를 하였는데, 이 중 顯宗3년의 수리는 팔관회를 부활시킨 崔沆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거란의 침입을 극복해 내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보수였다.
이후 황룡사탑은 靖宗원년에 낙뢰로 인한 피해를 입었는데, 文宗18년에 가서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다시 獻宗원년 6월과 10월의 2차례 훼손이 기록되어 나타난다. 이 훼손은 헌종 원년 8월부터 肅宗원년에 걸쳐 수리가 되었다. 황룡사탑은 高宗25년 몽골병에 의해 완전히 소실된 이후에는 더 이상의 중성이 이루어지 않았다.
『三國遺事』『皇龍寺九層塔』조를 비롯해 여러 기록에 훼손과 중성 기록이 남겨진 것은 신라와 고려 사회에 황룡사탑이 갖는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황룡사탑 초성 때에 탑에 호국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국난극복과 내부단합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신라의 삼국 병합 이후에 더욱 강조가 되었다. 황룡사탑의 의미는 고려 전기까지도 꾸준하게 유지되었다. 이는 太祖王建이 황룡사탑의 사례를 본 따 西京에 9층 탑을 세워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거나, 현종대 거란 침입을 극복하기 위해 朝遊宮의 재목을 이용해 황룡사탑을 수리한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 毅宗과 仁宗代에 들어서서 중흥궐 등 호국의 의미를 대신하는 건물이 창건되었는데, 이는 고려 내에서 황룡사탑이 갖는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황룡사탑을 포함한 신라삼보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태조의 질문은 개인적인 호기심 차원이지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김부식의 史論을 통해서 확인이 된다. 황룡사탑이 고종 25년에 소실되고 나서 더 이상의 중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의미 약화와 관련을 맺는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황룡사탑의 훼손과 重成기록 검토
Ⅱ. 황룡사탑의 정치적 의미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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