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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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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06호
발행연도
2012.6
수록면
141 - 173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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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후부터 중원의 정세가 안정되는 1680년대까지는 조선과 청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유로 우선 양국의 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당시 형성된 인식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후 시기의 인식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해당 시기에는 중국 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중국의 정세가 유동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정세변동은 언제나 주변국가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17세기 중국의 유동성은 조선내부의 정국에 변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청을 대상으로 한 기존의 연구에서 병자호란 이후 17세기는 아직 주요한 분석시기가 되지 못하거나 혹은 전근대시기 대외정보가 갖고 있는 ‘불확실’한 요소를 간과했다. 이 글에서는 對淸사신들이 갖고 있던 다양한 ‘역사적 변수’들에 주의하면서, 그들이 제출한 공식보고 내용의 경향성을 분석하고 그 대외정보가 조선내부의 정치상황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파악했다. 구체적인 연구시기는 삼번(三藩)의 난으로 청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1673년부터 대만 정씨세력이 청조에 귀순함으로써 중국의 정세가 안정되는 1685년까지로 설정하였다.
당시 조선 사신들의 공식보고는 현재 우리가 아는 역사적 상황과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使臣들은 ‘三藩의 亂’이 진압되어가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吳三桂의 승리를 강조하거나 청의 불리한 상황을 전달했다. 또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대만의 조선침공의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숙종 초 南人내부의 갈등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남인 내 일부세력은 대만침공설을 근거로 體府의 복설을 주장했고, 이후 체부의 권한을 지방군뿐만 아니라 중앙군영에까지 확장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빚어진 갈등은 숙종6년까지 지속되었고, 경신환국 당시 처벌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정치사 분야만을 다루었지만 청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정밀한 역사상을 제시하는 것은 사상사 연구와 결합할 때 가능할 것이다. 조선 지식인이 대외인식을 형성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외교의 장에서 발현되는 양상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들 연구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조선후기 대외인식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使臣의 공식보고와 대외위기의식
Ⅱ. 대외위기의식과 정치적 파장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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