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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창록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법사학회 법사학연구 法史學硏究 第49號
발행연도
2014.4
수록면
149 - 199 (5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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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친일’과 ‘참회’와 ‘풍토’를 핵심 코드로 하는 ‘이항녕 법사상’에 접근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식민지조선의 법학도로서의 이항녕의 모습들을 모아본 것이다.
이항녕은 ‘가난한 수재’였다. 스스로를 희생하며 자식의 ‘출세’를 위해 애쓰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입시경쟁을 뚫고 경성 제2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 예과에 입학하고, 법학과로 진학했다. 경성제대 시절 일본인 교수의 사랑을 받는 성실한 학생이었던 그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항녕은 “일본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1915년에 태어나 ‘나면서부터 일본사람’이었던 그는, ‘일본적 질서에 적응하여 살아 나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믿으며, ‘개인주의적?공리주의적인 속물근성’에 빠져 있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황국신민으로서 법연구에 정진’하여 사법대신 논문상을 수상했고, 경성제대 학생으로서는 가장 먼저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총독부 관리로서 천황=국체에 터 잡은 적극적인 내선일체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이항녕도 ‘식민지조선’을 앓았다. 고보 시절에는 ‘일본인 학생의 턱없는 우월감’에 상처를 받았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사립중학교 출신의 ‘지사파’들에 이끌려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총독부 관리로서 조선인 이민을 이끌고 만주에 갔을 때는 ‘조선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앞에 놓고’서 ‘식민지의 백성’의 ‘원통’함과 ‘식민지의 관리’의 ‘비천’함을 절감했다.
하지만, 이항녕은 흔들리면서도 결국 ‘시류파’였다. 지사파들 앞에서는 한편으로 ‘반항심’을 느끼면서도 ‘열등감’ 때문에 꼼짝을 못했고, 최종적인 결정의 기준은 결국 ‘출세’였다. 그리고 ‘버릴 용기’가 없어서 ‘죽창부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식민지 관리의 자리를 이어갔다.
그러한 이항녕에게 법은 ‘호구’의 수단이었다. 대학 시절 법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으나, 식민지 관리로서 ‘식민지의 백성에게는 법의 목적이 정의도 아니며 법질서가 합리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는, 한학으로 불교로 양명학으로 마음의 의지처를 옮겼다.
그 끝에서 ‘광복’을 맞은 이항녕의 ‘식민지인’으로서의 경험은 그의 법사상의 또 다른 코드인 ‘풍토’와 ‘참회’에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혹은 연결되지 않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이항녕의 법사상 Ⅱ’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목차

[국문 요약]
Ⅰ. 머리말
Ⅱ. 식민지조선에서의 삶
Ⅲ. 「肇國의 정신과 법률」
Ⅳ. 창씨개명
Ⅴ. 식민지조선의 관리
Ⅵ. ‘흔들리는 시류파’-맺음말에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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