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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영재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91집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23 - 50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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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승려 惠便은 574년 이후에 傳法활동(또는 정치적 도피)을 위해 개인적 자격으로 渡倭했지만, 당시 倭는 불교를 받아들이기에 미숙했기 때문에 播磨國일대에 還俗해 있었다. 그러다가 혜편은 584년에 蘇我馬子의 스승이 되어 왜 조정에 등장하였다.
소아마자는 飛鳥寺조영을 추진했는데, 비조사의 가람배치가 1탑3금당식의 고구려식이라는 점에서 비조사의 조영 계획에 혜편이 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조사와 관련된 기록에서 혜편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阿倍比等古臣의 고구려 파견이 실패로 끝난 것이 원인으로 짐작된다.
혜편은 아배비등고신의 고구려 파견을 소아마자에게 건의하여 고구려의 불교문화를 입수하고자 노력했지만, 고구려의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혜편은 소아마자에게 신뢰를 잃었고, 비조사의 조영과 관련된 제반 업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혜편의 행적이 이후에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혜편이 일선에서 물러남에 따라 왜 조정에서는 백제의 불교문화가 빠르게 확산되었지만, 고구려의 불교문화가 완전히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비조사의 가람배치가 1탑3금당식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慧慈가 聖}德太子의 스승이 된 점 등은 고구려의 불교문화가 정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 조정에서 고구려의 불교문화가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앞선 시기에 소아마자의 스승이 되어 불교의 전반적인 지식을 전해주었고, 비조사의 창건계획에 관여했던 혜편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관련 사료 제시
Ⅲ. 惠便의 渡倭
Ⅳ. 惠便과 飛鳥寺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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