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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황민호 (숭실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14호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161 - 199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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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30년대 초반 재만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과 정치부위원을 역임했던 이규채의 재판관련 기록을 분석하여 한국독립당과 군의 결성과정 및 항일무장투쟁의 전개과정에서 대해 살펴봄으로서 기존의 연구성과를 보완하였으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독립당은 1930년 7월에 조직의 결성을 완료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930년 이후 한인공산주의자들의 민족진영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자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진 것으로 보이며, 시기적으로 보아 간도봉가 본격화되는 상황과 맞물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1월 보통학교를 졸업 정도의 우수한 인력을 대상으로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으며, 초기의 병력은 1개 소대에 50명씩 6개 소대, 2개 중대로 편성된 300명 정도의 규모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한국독립당은 결성과정에서 소련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조국의 절대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진영의 조직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입헌민주주의와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및 의무교육의 실시 등을 주장함으로서 향후 건설될 독립국가의 면모를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군은 즉각적으로 장병의 모집과 군사훈련을 통해 대일항전을 준비하였으며, 주로 중국군과 연합한 한중 연합작을 전개하였으며, 이는 이청천, 이규채, 남대관, 조경한 등의 노력으로 추진되었으며, 이밖에도 1933년 후반까지 독자적인 소규모의 전투도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한국독립당과 군은 제1차 쌍성보전투가 끝난 후 중국관내로의 이동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했던 것으로 보이며, 대전자령 전투가 끝난 후 이규채의 주도하에 추진된 중국관내로의 이동 교섭이 일단락되자 한국독립당과 군의 중요 인원의 이동이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한국독립당과 군의 결성과 초기 활동
Ⅱ.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과 한중연합전선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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