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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방병선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한국학연구 제49집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103 - 128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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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870년대부터 1910년까지 조선시대 왕실용 자기 생산을 담당했던 사옹원 분원의 변천 과정과 원인, 이와 관련된 장인과 관리, 제작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연구 방법은 문헌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대상 문헌은 『分院邊首復設節目』(1874)과 『分院各項文簿抄錄』(1873-76), 『分院磁器貢所節目』(1894)과 같은 분원 관련 문헌과 『조선왕조실록』과 내장원『完文』과 같은 관찬사료, 지규식의 『荷齋日記』(1891-1910)와 같은 민간자료 등으로, 시기는 고종 연간인 1870년대부터 1910년까지로 하였다.
먼저 1870년대 분원은 여러 가지 적폐가 노정되어 제대로 된 자기진상이 어려웠다. 16명에서 24명에 이르는 원역들과 복설과 폐설을 거듭한 두 명의 변수들은 자본을 모으고 이를 통해 이익을 챙기려 하면서 서로간의 갈등으로 분원의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변수를 파하였다가 1874년 변수복설의 조치를 내리고 낭청과 원역, 변수의 협업 체제를 지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복설이 된 이후도 분원의 병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장인들은 분원응역에 응하지 않는 수가 누적되어 타지역의 장인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장인들의 경제적 보상을 위한 사번 자기의 판매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이익을 얻기 어려웠다. 반면 퇴임한 분원 관리들은 設店하여 판매에서 여러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1880년대 들어 왕실재정의 축소와 재정 운용의 합리화에 따라 1883년 낭관 파견금지와 허민번조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감생청의 공안이 발표되었다. 이어 원역 가운데 공인 12인을 지정하여 자기를 진상토록 하는 내용의 『分院磁器貢所節目』이 1884년 공표되면서 분원은 분원공소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지규식의 『荷齋日記』에 따르면 분원공소(1884-1895)는 정부의 원료 공급과 일부 재정 부담에도 불구하고 진상과 판매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새로운 기술 개발의 부재와 경영 실패로 문을 닫았고 이후 번자회사(1896-1905), 번사회사(1906-1910), 자기회사(1910) 등과 같은 회사체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정교한 디자인과 대량생산을 위한 철저한 분업화와 기술 혁신, 학교 교육을 통한 근대식 기술자 양성, 금융지원 등이 거의 전무하거나 미진하여 결국 근대화된 회사로 성공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채기 제작과 청화 안료 유통을 장악하며 조선 자기 시장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고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分院: 1870-1883
Ⅲ. 分院貢所: 1884-1895
Ⅳ. 燔磁會社: 1896-1905
Ⅴ. 燔砂株式會社: 1906-1910
Ⅵ. 磁器會社(砂器會社): 1910
Ⅶ.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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