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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병곤 (동국대)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25호
발행연도
2012.8
수록면
83 - 121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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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에 따르면 646년 倭의 改新政權은 小德高向博士 黑麻呂를 신라에 보내어 "任那의 調" 종결을 위한 인질을 요구하였고 이에 신라에서는 金春秋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여타 기록을 보면, 이듬해 김춘추는 入唐하여 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삼국시대의 인질 파견은 우호 성립과 유지가 주목적이었고 왕족이 파견되었으며 체류 기간은 평균 13년이었다. 그러므로 임나의 조라는 무형의 가치를 해소하기 위해 1년도 못되는 체류 기간을 가진 김춘추의 入倭는 인질행이 될 수 없다.
그러면 김춘추의 입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蘇我氏 일파를 타도하며 집권한 개신 정권의 다양한 정치적 목적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궁여지책이었다. 곧 개신 정권은 당제도입을 통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수립하려, 지리적으로 백제나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과거 소아씨 일파는 친백제 외교 노선을 유지했으므로, 개신 정권은 정변의 합리화 및 국정 쇄신 차원에서 외교 노선의 변화가 필요했다. 또한 소아씨 일가의 타도에 불만을 가진 백제 왕실의 외교적 반발도 무마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개신 정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책은 신라와의 우호를 통한 양단책의 추진이었다.
그런데 과거 소아씨 일파는 신라의 가야 통합으로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상실되자 명목상 신라로부터 임나의 조를 수령한다고 주장해 왔다. 반면 이들을 타도한 개신 정권은 허구적인 임나의 조를 주장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의 해소를 위한 적절한 출구전략이 필요했다. 이에 신라로부터 왕족급의 사신이 도래하면 이를 인질로 선전해 임나의 조를 종결시킨다는 명문으로 삼기 위해, 최고위급 인물인 흑마려를 신라에 파견하여 동급 인물의 답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입왜한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조카로써 왕자에 버금가는 인물이었으므로 개신 정권을 만족시킬 수 있었고 그들에 의해 실제와 달리 인질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인질 파견의 양상과 김춘추의 사행
Ⅲ. 개신 정권의 외교적 선택과 김춘추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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