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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성을 (아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연구 敎會史硏究 第44輯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7 - 61 (5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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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이 서교를 수용한 것은 1784년 4월 이후이며 적어도 1786년 3월까지는 비교적 열심이었고, 1787년 12월의 정미반회를 계기로 거리를 두게 되었으며 1791년 신해교안을 계기로 서교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1795년 7월과 1799년 4월에도 서교와 관련이 있다고 모함당했으나, 그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1801년 2월 신유교안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때도 이미 서교와 관계를 끊은 것이 문초 중 밝혀졌고, 1801년 겨울 다시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관계없음이 밝혀져 죽음을 면하고 흑산도로 유배 길을 떠났다. 1795년 이후 1801년까지 모함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에서는 아무런 서교 관련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관계를 끊었다는 증거만이 드러났다. 이것은 이미 1787년 12월 정미반회를 계기로 서교에 거리를 두게 된 정약전이 1791년 신해교안을 계기로 서교와 완전히 결별하였음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정약전은 1776년 상경 이후 본격적으로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에 젖어들었다. 이것은 대체로 양명좌파적 경향에 더하여 원시유학적 경향을 띤 것으로 보이고 이런 학문적 경향은 그가 서교를 수용하는 사상적 태반으로 기능하였다고 하겠다. 퇴계 이황의 리발(理發)의 철학은 양명학을 비판하기는 하였지만 사상사적으로 볼 때 기호남인들에게 수용되면서 중국에서 양명학이 행한 것과 유사한 기능을 하면서 영향을 미쳤다. 이런 기능이 성호 이익 단계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소장성 호학파 단계에 이르러 양명좌파적 경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또 여기에 이익의 원시유학적 경향이 결합되어 이것을 사상적 태반으로 하여 상당수 소장성호학파 사람들이 서교를 수용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소장성호학파 가운데 대표적 인물의 하나가 바로 정약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교를 떠났다. 정약전의 사상 전개와 관련하여 서교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 주자성리학과 조선 후기 실학의 내재적ㆍ발전적 길 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목차

국문초록
1. 서언
2. 관련 자료의 검토
3. 주어사 강학회 이전(1758~1779)
4. 주어사 강학회 이후(1779~1801)
5. 결어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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