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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혜련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71輯
발행연도
2014.7
수록면
35 - 6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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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12년에 치러진 왕세자 곧 숙종과 인경왕후의 국혼의 배경을 17세기 정치세력의 한 축으로 존재하였던 산림세력과 외척에 모두 해당하는 당대 최고의 명문 광산 김문의 가세와 연계하여 연구하였다. 인경왕후가 당시 세자빈으로 간택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가문의 명망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곧 그녀는 서인 율곡의 적전이었던 김장생의 현손이었다. 그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수학하였고, 효종 · 현종대에 정계에 진출하여 국정 운영에 사상적 · 정치적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 조부 김익겸이 병자호란 당시 순절하였고, 증조모 서씨 역시 강화도 함락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곧 성리학 국가에서 갖춰야할 명문과 의리, 명망을 모두 갖춘 가문의 위상이 인경왕후를 간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국혼이 치러진 현종 연간은 서인 주도의 정국이었으나 서인과 남인, 서인 내에서 산당과 외척계열의 대립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산림의 기반이 되는 가문의 배경을 가지고 서인 산당계열로 활동하였던 광산 김문이 국혼을 통해 장차 외척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인 산당계열에 반감은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이들은 능가하기 어려웠던 현종이 숙종의 치세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광산 김문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현종대 외척 청풍 김문도 결국 서인이었기 때문에 김장생의 직계후손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으며, 외척의 정치 참여, 척신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산당도 현종대 정치적 공세를 경험하면서 국혼을 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들로 인해 숙종과 인경왕후의 국혼이 가능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왕세자 국혼의 시행 과정
3. 인경왕후 선대 광산 김문의 위상
4. 현종대 광산 김문의 행보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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