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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경옥 (목포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49집
발행연도
2014.12
수록면
127 - 174 (48page)
DOI
10.18496/kjhr.2014.12.4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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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는 해상에서 발생한 조난사고이지만, 타국의 경계를 침범한 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동아시아 사람들은 표류민을 구휼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19세기 중국인들이 조선의 서해해역에 표류해 왔다. 조선후기 중앙정부에서 간행한 관찬자료에서 총 138건의 중국인 표류사건을 검출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인 표류사고의 발생시기, 출항지와 표착지점, 항해목적과 선적화물, 그리고 표류민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의 對淸關係가 어떻게 변화되어갔는가를 검토하였다.
17세기 중국이 자국민의 海外渡航을 허용하자, 康熙年間(재위 1661~1722)에 연해지역 주민들이 연안항로를 개척하거나 해외로 진출하였다. 이 시기의 朝淸關係는 과거에 비해 의례나 형식면에서 대폭 축소되었으나, 양국 간의 현안문제인 交易?越境?漂民?疆界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직관계를 표방하였다. 뒤이어 雍正帝(재위 1722~1735)가 등극하면서 조청관계는 안정되고, 조선의 지식인들도 청조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조청 간의 표류민 문제에 대한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강희~옹정제의 뒤를 이어 등극한 乾隆帝(재위 1736~1795)는 안정된 정치와 풍부한 재정을 기반으로 중국 역사상 최대 영역을 통치하였다. 특히 건륭제는 동아시아 표류민에 대한 구호 조처를 단행하여 중국인의 해상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에 비례하여 표류사고는 전대에 비해 3배로 증가하였다.
중국인이 조선 해역으로 표류해오자, 비변사 관원들은 표도민을 구휼하는 한편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였다.조선의 관원과 중국인 표류민 간의 대화를 기록한 문건이 ?問情別單?이다. 수록 내용은 표류인의 성명, 거주지, 신분, 출항지, 목적지, 선적물품, 농사의 작황, 토산물, 전답, 세금, 지역 간의 거리, 지방관원, 표류선의 규모, 부속도서, 어로기술, 항해술, 海賊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중국 표류인들이 만난 표착지점 주민들은 비변사 관원들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중국 표류민을 異國人으로 경계하기보다 해난사고에서 살아서 돌아온 뱃사람으로 인식하였다. 급기야 19세기에 이르면 중국인들은 고기잡이를 핑계 삼아 우리나라 해역을 넘나들었고, ‘표류민’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내륙 깊숙한 곳까지 출입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조선의 서해해역에 표류한 중국인 현황
3. 중국 표류민들의 항해목적과 선적화물
4. ?문정별단?을 통해본 조선의 對淸認識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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