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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영애 (경주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28호
발행연도
2013.8
수록면
423 - 45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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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관심은 ‘신라에 서역인이 살았는가?’, ‘신라와 서역은 교류가 있었는가?’에 있지 않다. 이 글은 신라에 서역인이 살았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신라에 서역인의 到來와 서역관련 미술품의 재현이 얼마만큼 상관관계를 가지는 지에 관한 궁금증에서 출발하였다. 이 때 ‘미술품의 재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첫째는 서역인들과의 ‘접촉’혹은 ‘교류’의 결과 기왕의 미술에 변화를 초래한 경우이고, 둘째는 도래한 사람, 즉 서역인의 특이한 얼굴 모습을 직접 미술품으로 재현한 경우이다. 우선 첫 번째 관점에서의 결과물은 통일기 신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통일기 신라의 미술품은 강력한 당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에 서역인 혹은 서역문물이 유입되었을지라도 이미 동아시아 미술의 표준이 된 당의 미술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어 그들로 인한 신라 미술의 변화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당을 통한 ‘서역 요소’의 유입은 있었지만, 서역인에 의한 직접적인 ‘서역 영향’을 보여주는 신라의 미술품은 알려진 바 없다. 문제는 두 번째 경우인데,그 대표 예가 바로 원성왕릉 무인상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원성왕릉 무인상을 두고 서역인을 모델로 하여 미술품으로 재현하였다거나, 더 나아가 신라와 서역간의 교류를 입증하는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무인상의 얼굴 모습이 唐胡人俑이나 불교 金剛力士像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서역인이 신라 왕릉 호위의 역할을 맡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역인이 통일기 신라에 도래하였을지라도 그들의 모습을 곧바로 미술품으로 ‘재현’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들의 역할이 공식적인가, 비공식적인가에 따라 달라지며, 또 그 규모가 어떠한가도 큰 변수가 된다. 그들의 신기한 모습을 작은 陶俑으로는 표현하거나 벽화에 胡旋女를 등장시키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러한 범주를 넘어서는 경우는 심지어 ‘열린 제국’이라고 불리던 가장 개방적이고 유연한 당제국의 미술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접촉’과 ‘교류’,‘요소의 전달’과 ‘영향’
Ⅲ. 唐 미술에 보이는 서역 ‘요소’와 ‘영향’
Ⅳ. 신라인의 서역인 인식과 미술품으로의 재현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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