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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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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불교학보 불교학보 제57집
발행연도
2011.4
수록면
145 - 179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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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찰은 한국 현대불교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던 불교정화운동의 주역이었던 정금오의 정화운동의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지금껏, 불교정화운동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었으나 총체적인 연구까지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총체적·전면적인 연구단계로 나아가려면 정화운동의 개념·명칭·성격·원인·결과·영향 등 다방면에서 접근이 요청된다. 그리고 정화운동에 참여한 승려들에 대한 미시적인 연구도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찰의 대상인 정금오는 정화운동의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연구자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필자는 그간 정화주역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를 수행하였으나 정금오에 대해서는 자료부족 등으로 인해 연구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문도들이 자료집·증언집을 내는 등 연구 환경의 변화로 인해 정금오의 정화운동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하였다. 정금오는 일제 불교하, 제방의 선원에서 수행을 하던 수좌이었다. 그러던 중 그가 1928년 무렵 서울 대각사에서 근대의 고승 백용성을 시봉하는 인연을 가지면서 불교정화운동에 대한 자극을 받았다. 그후 1941년 3월, 선학원에서 개최된 유교법회에 참가하였다. 이 법회는 식민지 불교의 극복, 계율정신의 수호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가 이 법회에 참가한 것은 선학원, 조선불교선리참구원, 조선불교선종 등 일제하 수좌계 활동의 구도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공간에서도 선학원, 팔달사에서 수행을 하던 정금오는 불교정화운동이 발발하였을 당시 불교 교단정화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는 그가 불교정화운동의 최일선에 서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그 이후 정금오는 하동산, 이효봉, 이청담 등 정화주역의 고승들과 다양한 정화활동에 동참하였다. 이후 그는 비구승단의 아사리, 부종정, 감찰원장, 총무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렇게 그가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함은 그의 수행관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참선수행, 간화선 수행을 최고로 여기었는데, 일제불교 영향으로 수좌들의 수행풍토가 파괴된 것을 개탄하였다. 이에 그는 수행풍토 회복, 참선도량 회복, 정법불교의 지향을 위해서 불교정화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었다. 그러나 그는 정화운동이 일단락 되었던 1962년 이후 조계종단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는 불교정화운동의 산물이 당초 의도, 이념대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재정화를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개진하면서, 그를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정화의 기치를 들기는 하였지만, 그 실천 단계까지는 나가지 못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입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본고찰은 정금오의 불교정화운동에 대한 최초의 글이기에 부족한 측면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점은 필자의 후속연구로 보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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