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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흥숙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족문화 한국민족문화 제57호
발행연도
2015.11
수록면
235 - 265 (31page)
DOI
10.15299/jk.2015.11.57.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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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는 부산광역시 내에서 육지와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유인도이고 하나의 자치구를 이루고 있다. 근대 이후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인구 밀집지역이 되었고 관련 연구성과도 나왔지만, 근대 이전 특히 조선시대의 영도에 대해서는 별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국영 목장, 봉산으로 사용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없는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존재한 것처럼 보였던 ‘섬’ 영도는 실제로는 (육지) 사람의 생활 공간으로 존재하였다.
부산항의 가장 바깥 경계에 위치하면서 부산의 길목이 되기도 하고, 부산항을 해양으로부터 지켜주는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인식은 古地圖에 나타나기도 하고 여러 고문헌 속에 기록되면서, 사람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에 자리할 수 있었다.
국영 목장, 봉산으로 존재한 영도는 차단된, 금지된 공간이 아니라, 이를 운영하기 위한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공간이었고, 사람들이 있으면서 사당(제사 공간)이 생기는 등 상징적인 공간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육지와 가까웠기 때문에 영도와 마주보는 육지 공간, 즉 일본인 마을인 왜관과 가장 가까웠다. 특히 조선에 온 일본인들은 모두 대마도인들로 대마도와 섬이라는 같은 지형을 가진 영도에 대해 친숙하게 여기고 있었다. 왜관을 그리는 그림에도 영도가 등장하고 그들의 사당도 있는 공간이었다. 영도는 섬이라고 하여 육지와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였다. 나아가 사람들에게는 경험이 이루어지고 기억이 되는 공간으로 의미를 쌓아가고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영도의 立地
3. 入島와 ‘경작’의 양상들
4. 일본인의 入島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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