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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인천학연구 인천학연구 제7권
발행연도
2007.8
수록면
293 - 327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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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칠은 1902년 인천 용동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 부모를 따라 어렸을 때부터 내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아버지 박삼홍(박대여)는 1897년 나인데청년회 창립회원으로 1903년부터 2년간 나인데 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한 기독교 청년지도자였다. 그의 강한 민족의식은 1907년 영화소학교에 군악기와 소총을 기증하여 군사교육을 통하여 국권회복 하고자 하는데서 잘 나타난다.?? 박남칠도 아버지의 강직한 성격을 그대로 닮아 강한 민족의식과 더불어 물려받은 미곡상을 운영하는데도 상도덕을 엄격하게 지켰다. 또한 영화소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학교에 기부금을 내는 등 교육자선가로 활동하였다.??박남칠은 1920년 대 후반부터 내리 엡웟청년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인천 기독교 청년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7년 내리교회에서 개최한 특별대전도회에 참석하여 기독교 사회주의를 처음 접하고 이에 심취되었다. 그래서 교회 중심의 청년 신앙활동에서 벗어나 인천 지역 빈민을 구제하는 실천적 기독교 청년운동을 하였다.?? 또한 1933년 기독교인이었던 여운형의 2차례 인천지역 시국강연회는 박남칠을 비롯한 기독청년들이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여운형을 추종하게 되었다.??1935년부터는 내리 조선소년척후대 대장을 하면서 청소년 운동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척후대원들에게 인천지역 각종 행사에 참석하여 봉사하도록 하였으며. 하나님과 국가에 대한 책임과 남을 위한 봉사를 통하여 몸과 마음을 남을 도와주기 위해‘준비’ 모범 소년척후대로 발전시켰다.?? 박남칠은 사업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미곡상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신흥 청년사업가로 주목받았다. 쌀 정량을 속여 파는 당시의 폐습을 쇄신하고자 정량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빈민을 위한 구제사업에도 적극 참여하는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일본인들도 박남칠의 위상을 새롭게 인식하여 일본인 상공인을 위하여 세운 인천상공회의소에 김용규와 함께 조선인 평의원으로 활동하도록 할 정도였다.?? 또한 1938년 인천 미곡상 조합을 책임지는 조합장으로 선출되어 그 당시 잘못된 미곡상들의 부도덕한 상거래 질서를 바로 잡는 운동을 전개하여 인천 지역 서민들로부터 많은 호응과 찬사를 받았다. 박남칠은 어렸을 때부터 친분을 갖고 있던 대표적 좌익인물인 이승엽을 인천미곡상조합 사무장을 채용하여 해방기에 200명의 인천 미곡상들이 좌익 진영이 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박남칠은 독립운동 관계로 감옥생활을 하고 인천으로 돌아온 인천 대표적 좌익인사인 조봉암에게 미강업조합을 운영하도록 하면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박남칠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천지역 감리교회가 일제의 강력한 압력에 못 이겨 친일행위에 앞장서면서 많은 실망을 하면서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은 참다운 신앙인이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박남칠은 김용규, 이보운, 윤석준 등과 함께 조봉암의 지도를 받으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발 빠르게 인천 좌익진영을 지도하는 등 핵심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인천부 초대부의원이 되어 김용규, 이보운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인천 좌익진영의 위세에 눌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던 인천 우익진영은 서울 우익 청년단을 인천으로 불러들여 인천 지역 전평을 초토화하여 어용노조를 세웠다. 이것이 인천 지역의 좌우익 진영이 서로 폭력으로 대결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우익 청년단체인 평안청년회가 있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기독교 반공주의자들이 존재하였다. 박남칠은 자신이 꿈꾸던 하나님 세계 안에서 평등하게 잘 사는 인민세상은 사라져 버리고 좌?우익진영이 피터지게 싸우는 한복판으로 들어가 대결하는 역사의 비극을 맛보게 된다.??박남칠은 1947년 인천지역 노동자의 총파업을 계기로 인천 경찰서에 체포되면서 우익진영은 비로소 인천 지역의 정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박남칠은 1949년 인천좌익진영이 우익진영의 잔혹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게 많은 좌익 인사들이 전향선언을 하면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그동안 무지몽매한 좌익활동에 대한 반성을 하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 봉사하겠다는 전향광고를 대대적으로 하였다. 이 시기 박남칠도 전향선언을 하고 경찰의 지시에 따라 김용규와 함께 국민보도연맹 임원을 맡게 된다. 이후 집에 칩거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4일 인민군이 인천에 들어오기 직전 월미도 앞 바다에서 수장되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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