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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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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인천학연구 인천학연구 제15권
발행연도
2011.8
수록면
147 - 187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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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근대 인천의 ‘군함관람’ 및 이를 매개로 한 ‘인천관광’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1883년 인천항의 개항과 1901년 경인선의 개통은 국가의 관문이자 교통의 요지로서 인천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1910년대 이후 월미도·송도 등지에 유원지가 개발되면서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도시’로 부상했다. 군함관람 역시 인천관광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군함관람은 ‘군함’·‘관광’·‘철도’ 등 근대의 산물이 복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인천의 지역사 및 관광사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군함관람은 그 동안 주로 월미도·송도 등 유원지 개발에 관심을 두었던 인천지역 관광사를 보완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한국인들이 인천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에 승선해서 관람한 사례는 1901년 8월에 처음 나타난다. 이후 1900년대에는 러일전쟁·을사조약·정미조약 및 의병투쟁 등으로 말미암아 일반인들에게 군함관람이 좀처럼 허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병탄 직전인 1910년 5월 학생들이 군함을 관람했다. 병탄 이후 1910년대에는 9건의 사례가 파악된다. 특히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 기간에 맞춰 군함관람이 이뤄졌다. 이때 세워진 수족관과 함께 군함은 인천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1920년대에도 9건의 사례가 확인된다. 1922년 매일신보사에서 모집한 ‘군함춘일관람단’은 최초의 군함관람단으로 보이며, 같은 해 경성부·인천부에서도 ‘군함참관단’을 모집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열린 평화기념동경박람회 기간에 맞춰 이뤄진 것으로, 군함관람이 일제의 홍보수단의 일환이었음을 다시 보여준다. 1930년대에는 10건의 사례가 검색된다. 그러나 1920년대와 같은 관람단 모집은 보이지 않으며,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이후 점차 사라진다. 이처럼 군함관람은 인천의 지역사나 관광사뿐 아니라 일제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들에게 군함이란 일본의 발전상뿐 아니라 극복하기 힘든 군사력의 우위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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