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인천학연구 인천학연구 제23권
발행연도
2015.8
수록면
7 - 44 (3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신탁업은, 1906년에 藤井寬太郞의 藤本合資會社가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들의 토지를 위탁관리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다. 1908년 3월에는 남선상사신탁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1910년 12월에는 인천에서 조선신탁합명회사가 출현하였다. 1921년 11월에 설립된 조선신탁주식회사는 조선신탁합명의 신탁업무를 승계하여 설립되었다. 인천재계의 주요 인물들이 조선신탁의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인은 감사역 장석우를 비롯하여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조선신탁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 강점기 한국에 설립된 신탁회사들은 주로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었다. 따라서 조선신탁의 사례는 재조일본인의 신탁회사 경영에 관한 사례연구로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1920년대는 장기불황이 계속된 ‘공황의 시대’로, 이때 설립된 조선신탁의 영업이 부진한 것은 당연했다. 조선신탁은 은행으로부터 차입한 자금과 일반에서 흡수한 신탁금을 토대로 주로 대부업을 통한 이자수입에 의존했다. 불안한 대출은 정리하여 영업의 건전화를 꾀했다. 1928년 12월 이후 조선상업은행 출신 금융전문가 池邊竹次를 영입하여 사장에 추대했고, 1930년 2월에도 역시 關滿登을 영입하여 전무 겸 지배인에 선임했다. 그러나 1930년 11월에 발생한 배임횡령에 관한 고소사건으로 조선신탁은 영업상 큰 타격을 받게 된다. 1930년 이후 조선신탁이 ‘반휴업상태’에 빠지고 무배당을 기록하였다. 조선신탁의 중역인 堆浩가 조선산업의 토지를 인수하면서 동원한 자금이 배임과 횡령으로 마련되었다 하여 ‘토지부정취득사건’으로 규정되었다. 결국 당기순손금이 발생하고 말았다. 조선신탁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堆浩一派와 桑野健治一派가 대립하였다. 이 두 세력간의 대립이 장기불황과 맞물리면서 조선신탁의 경영을 어렵게 만들었다. 경영권 다툼이 치열했던 것은 조선신탁의 신탁금을 사금고처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영부진에 빠져있던 조선신탁은 1932년 1월 신탁업을 포기하고 금융회사로 전환되었다. 1931년 6월 9일에 제정된 조선신탁업령이 동년 12월에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신탁업령의 최소자본금 규정인 200만원은 충족할 수 있었으나, 조선신탁의 內訌, 연이은 不祥事件, 대부업 중심의 후진적 신탁업 경영은 엄격한 통제를 표방한 조선신탁업령 하에서는 유지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6-359-002362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