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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손경희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100집
발행연도
2016.9
수록면
75 - 112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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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일제시기 경북 경산군의 이주일본인 증가와 농업경영을 살펴보았다. 경산군은 경부철도 정차역인 경산역이 생기면서 일본인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도로와 철도 교통이 편리하고, 금호강 유역의 대구평야에 주목하여 이 지역으로 많이 이주했다.
일제 초기 경산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무역판매와 곡물 거래를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경산군은 경북 북부 지역의 곡물집산지였다. 경산군에 집산된 곡물은 경산역을 통해 주로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당시 경산역 발송화물 가운데 곡물발송 비율이 전체 발송의 95%를 차지할 정도로 경산군은 곡물 이출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산역에서 발송된 물품은 쌀, 보리, 콩, 잡곡, 가마니, 선어, 해초, 종이, 목재, 신탄 등이었다. 이 가운데 쌀과 콩이 85.8%를 차지할 정도로 곡물이 압도적이었다. 경산역에서 이출 된 곡물의 특징은 타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이 아닌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들이 이출된 것이다. 더구나 이출 양이 이입 양보다 3배 이상이었다. 곡물은 경성, 부산, 대구, 일본 등지로 이출되었다. 구체적으로 쌀, 보리는 경성 · 부산 · 구마산으로, 콩은 부산 · 鹿兒島 · 尾道 · 下關 · 기타 일본으로, 선어 해초는 김천, 숯 · 땔나무는 대구로 이출되었다. 당시 경산역은 전형적인 식민 이출 역이었다.
경산군 이주일본인들은 곡물거래와 더불어 농업경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제 전시기 동안 농림목축업에 가장 많이 종사했다. 이주일본인들은 러일전쟁이후 본격적으로 농업경영에 나섰다. 그들은 하양 · 경산 · 자인 일대의 토지를 사들여 가족을 동반한 농업경영을 했다.
한편 금호강 일대의 비옥한 대구평야를 중심으로 일본 거대 농장과 회사들이 세워졌다. 당시 경산군 일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한국척식주식회사, 한국흥업주식회사 경산출장소 등이 설립되어 대지주로서 소작을 통한 농업경영을 하였다. 이들 농업회사들은 경산역을 중심으로 농장을 개설하여 소작료 수취, 곡물이출의 편리를 적극 활용했다.
1910년 7월 영업 목적이 비슷한 한국척식주식회사와 한국흥업주식회사가 합병하여 거대지주인 조선흥업주식회사 경산 농장이 되었다. 조선흥업 경산 농장은 소작을 통한 수탈경영을 하면서 토지소유 규모를 확대했다. 조선흥업 경산 농장의 토지 소유 특징은 기간지 중심, 논밭 비율의 6:4 비율 유지, 논 소유 면적의 증가, 잡지가 거의 없는 점이었다. 또한 논 투자 금액이 밭 투자 금액의 2배 이상이었지만 조선흥업 다른 지점에 비해 수익은 가장 낮았다. 그리고 수리조합 몽리구역은 조선흥업 각 농장에서 가장 컸다. 조선흥업 경산 농장 안에는 산미증식계획시기 경산 · 연호제 · 금호수리조합이 세워졌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경산군 일본인 이주 증가와 곡물 거래
Ⅲ. 경산군 이주일본인의 농업경영과 토지소유 특징
Ⅳ.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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