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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이론학회 사회이론 사회이론 제50호
발행연도
2016.12
수록면
63 - 102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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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한국 `유교-근대` 논의가 갖는 추상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 연구는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유도회총본부의 유교 근대화 작업의 경과와 참여 세력들에 대해 역사적 분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946년 3월 유교계의 통합 조직으로 출범한 유도회는 김창숙의 지도하에 유교 복원과 부흥을 목표로 한유교 근대화 작업에 착수했지만, 추진 과정에서 유교계의 여러 분파들과의 갈등을 낳았다. 유교의 민족화의 상징적 작업이었던 성균관의 중국 유현 위패 매안 조치는 보수 유림의 이반을, 유교 대학 설립 과정에서는 좌파 유교인의 이탈을, 향교 재산관리 합리화 방안에서는 지역 유림의 반발을 각각 야기했다. 그 결과 유교계 단체들을 통합하여 출범했던 유도회는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수의 세력들이 이탈하여 유교계 대표성과 조직장악력이 약화되었다. 약화된 유도회 조직을 새로 채운 것은 당시 유교계와 연대하여 임시정부봉대운동을 추진했던 해외 망명독립운동가들과 아나키스트들이었는데, 이들은 김창숙과 함께 유교계 친일 세력 청산과 유교 민족화에 적극 나섰다. 이는 1950년경의 유도회 임원 명단을 통해서 확인 가능했는데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초창기의 각파 연합체의 성격에서 벗어나 1947년 이후 유도회는 유교계 독립운동가와 후손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특히 실무 부서와 감찰위원회에 이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둘째, 유도회의 가장 강력한 후원 세력이었던 정통 유림은 근대적 유교 조직화에 소극적이어서 군 단위 지부에만 참여했고 중앙 및 각 도 본부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유교 근대화의 대상인 정통 유림은 유도회와 무관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셋째, 유도회는 본래 비정파성을 강조했지만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임시정부 계열의 우파 민족주의 정치에 깊이 개입했는데, 내부의 사상 논쟁 없이 서둘러 정치에 개입하여 유교와 근대 정치 이념 사이의 논리적 학문적 연결 문제를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결국 유도회의 유교 근대화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잠정적인 중단 상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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