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순교 (육군 삼사관학교)
저널정보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연구 인문연구 제78호
발행연도
2016.12
수록면
61 - 98 (3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삼국사기』는 927년 한겨울 경애왕이 포석정에 유행하여 주흥에 빠졌고, 때마침 신라에 침입한 견훤에게 체포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당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인 것은 물론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했으며 군사들을 풀어 궁중의 비빈마저 집단 강간하는 등 일대 난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한데 『삼국사기』의 기록에선 경애왕 사인과 시해 주체, 죽음의 장소, 죽음의 시기 등이 특정되지 않는 등, 기록의 상이, 혼선이 나타난다.
최근 일각에서는, 포석정에 포석사(鮑石祠 ), 충렬묘(忠烈廟) 등이 있었던 점과 『화랑세기』,『각간선생실기』등 문헌 등을 전거로, 『삼국사기』기록과 달리 927년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주연을 연 것이 아니라, 전몰장병 추모와 관련이 있는 팔관회, 남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일련의 불계(祓禊), 혹은 제천행사를 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왕건에게 누차 독전(督戰)의 서한까지 보내는 등 적극적 행적을 보인 경애왕이, 소극적인 자세로 제사를 지내며 신의 가호만 빌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라에서 진혼은 전쟁이 종료되고 행해진 점, 282년 동안 신라에선 아예 팔관회 자체가 개최된 전력이 없는 점, 전몰자의 진혼을 목적으로 한 행사는 주로 사찰이 중심이었으며, 주관자는 승려였던 점 등에서 모순을 드러낸다. 실제 927년 포석정 현장을 전한 기록에선 단 한 명의 승려도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를 저본으로 했으면서도 『삼국유사』에서 가감한 대목, 곧 일연의 해석은 눈여겨 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일연의 지적에 의하면, 경애왕이 포석정에 유행한 시점은 견훤이 고울부(영천)를 떠나 월성의 지근인 시림(始林)에 쇄도한 직후였다. 경애왕은 생사의 위기에서 포석정에 유행한 것이었다. 결국 포석정 유행은 왕의 파천(播遷), 안위를 도모한 피신일지언정, 평화로운 시기에나 있을 주흥, 제례로 해석할 수 없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포석정 유행에 관한 종래의 해석
Ⅲ. 포석정 유행을 전후한 내외 상황
Ⅳ. 포석정 유행 시점과 성격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7-001-002130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