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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민영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9집
발행연도
2017.8
수록면
45 - 7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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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육군참위 이충순(1877~1907)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었다. 부친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연산현감을 지낸 이병제였다. 그의 부친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반일활동을 통해 농민군을 지원했던 항일 민족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애국적 활동과 성향은 아들 이충순에게 전수된 것으로 인정된다.
이충순은 1900년 10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9월 졸업하였다. 1904년 6월 서울에 주둔한 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에 견습 참위로 보임되었다. 그 이듬해인 1905년 4월에는 전남 광주에 주둔하던 진위보병 제4대에 전임되었고, 다시 같은 해 9월에 경기도 수원 주둔 진위보병 제1대대의 견습 참위로 보임되었다.
수원의 진위대에 배속된 이충순은 1906년 徵上隊로 서울에 올라와 주둔하였다. 이어 그는 서울 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의 견습 참위로 전임되어 군무에 봉직하였다. 대한제국 병탄을 위해 일제가 군대해산을 감행하였을 때, 그는 서울 시위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 시위대의 해산에 항거하여 군인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남대문 부근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이 날 시위대군 전사자는 모두 79명으로 이충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충순은 남상덕과 함께 남대문 시가전의 전사자 가운데 이 날의 전투를 상징하는 인물로 역사상 부상되었다. 남상덕을 特記하는 이유가 일본군을 가지하라(梶原義久) 대위를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 장본인이라는데 있는 데 비해, 이충순을 기리는 이유는 효성과 애국정신을 겸비한 참된 군인상으로 부상된 데 있다고 생각된다. 서모 박씨가 假託되어 이충순이 남긴 永訣辭와 孝行 등이 인구에 회자된 결과 이러한 인물상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요컨대, 연산군수 이병제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보여준 반일 민족적 활동과 아들 이충순이 1907년 서울 시위대 시가전에서 보여준 애국충정의 항일전은 13년간의 세월을 넘어서 동일한 궤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생생한 역사적 상관성을 확인케 해준다.

목차

1. 머리말
2. 家勢와 성장과정
3. 軍務 봉직
4. 侍衛隊의 시가전과 순국
5. 순국에 대한 論贊
6.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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