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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성호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울산대학교 사학회 울산사학 蔚山史學 第十九輯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179 - 209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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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은 조선왕조 초기인 15세기부터 철광석을 포함한 토철을 산출하는 제철 원료의 산지인 동시에 이들 제철 원료에 대한 제련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달천의 제철장으로서의 입지는 물자의 운송과 이동이 용이하지 않았던 전근대 시기에는 매우 큰 이점이었다.
달천에서는 수철(水鐵)과 생철(生鐵), 정철(正鐵), 백동(白銅) 등이 제련되었는데, 전근대시기 기록에서 일반적으로 수철과 생철이 동일시되던 것과는 달리, 달천 관련 문헌 기록에서는 이 두가지가 구분되고 있어서 그 이유가 규명될 필요가 있다.
달천 철장의 전체적인 감독은 중앙에서 파견된 철장관이나 지방관(울산 군수)이 담당하다가 점차 지역의 사족(土族)이 그 일을 떠맡았을 것이다. 다만 왜란과 호란 이후에는 후술하듯이 관영제철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국가 권력을 위임받은 감독관은 차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달천에서 감독관의 통할 하에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인력은, 전문 야장(冶匠)들과, 취련군(吹鍊軍), 초철군(妙鐵軍) 등으로 불린 일반 잡역부들이었다. 잡역부들은 대부분 달천 철장이 소속된 울산군과 인근 읍에 사는 농민들이었는데, 철장에 동원됨에 따라 농사상의 피해가 심각하여 철장제(鐵場制)의 효율성에 대한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해도(海島)나 양계(兩界) 지역에서 수군(水軍)을 제철 작업에 동원한 예들이 있는데, 달천의 경우에도 일시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 소속 수군들을 제철 노역에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유배형에 처해진 서해도(西海道) 지역 죄수들을 경상도의 제철장에 배치하는 것을 형률(刑律)로 정해놓고 있었던 만큼, 경상도의 제철장을 대표하는 달천에서는 서해도 지역 죄수들의 노동력을 활용했을 것이다.
전문 장인들과 농민 등에 대한 노동력 징발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달천의 관영 제철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붕괴되었다. 이후 달천 철광은 1657년 이의립이 달천 철광을 ‘발견’할 당시까지 휴면 상태를 지속하였다. 그런데 이의립의 ‘발견’보다 2년 앞선 1655년에 조선 정부는 이미 달천 철광의 존재와 그 휴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달천에서의 제철의 재개와, 재정 보조를 위한 민간 제철의 허용 및 수세(收稅) 방침을 결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1657년에 이의립이 달천 철광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왜란과 호란 이후 휴면 상태에 있던 달천의 제철을 예전의 관영제철 방식 대신 효율성 높은 민간 제철 방식으로 전환하여 재가동하고 그 생산물에 대해 국가가 수세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 사정을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의립의 달천 ‘발견’ 후 곧바로 국가 공인 하에 이의립의 주도로 민간 제철이 개시되고, 그로부터 많은 세금과 일종의 납속(納粟)이 국가에 수납될 정도로 제철이 호조를 띠었던 역사적 사실이 이를 분명하게 증명해 준다 할 것이다.

목차

머리말
1. 제철 원료 산지 및 제철장(製鐵場)으로서의 달천
2. 달천 철장의 제련 물종
3. 달천 철장의 감독과 제철 노동력
4. 양난 이후 달천의 제철 체제 뱐동과 이의립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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