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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병희 (경기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46호
발행연도
2019.8
수록면
59 - 8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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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나당전쟁 시기에 벌어진 기벌포 전투에 대해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새롭게 해석해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학계에서 논쟁이 되어 온 설인귀의 행적과 관련된 문제들을 재검토하고, 전투의 전말과 나당전쟁의 종료 시점에 대한 당대의 인식이 어떠하였는가를 확인해보았다. 이에 대한 내용 및 이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기벌포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설인귀의 행적은 『구당서』에서 상원 연간(674년 8월 ~ 676년 11월)에 유배를 간 상태라 하였지만, 이 기간 동안 당의 한반도 전선에 장수로 투입될 여지 또한 충분함을 살펴보았다. 특히 필자는 7세기 중 · 후반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설인귀가 천성 전투 이전 보다는 기벌포 전투 이후에 유배를 갔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였으며, 기벌포 전투가 실제로 발생한 시점은 675년 11월로 판단하였다. 필자가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676년 2월에 당이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각각 요동고성과 건안고성으로 옮기면서 安東官을 맡았던 ‘華人’들을 모두 罷하였다는 『자치통감』의 기사에 그 근거를 둔다. 결국 기벌포 전투는 다음 해인 676년 초까지 지속되었으며, 설인귀 부대의 상륙전 승리 이후 크고 작은 22번의 교전이 있었지만 이를 신라군이 모두 승리하면서 곧바로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가 축출되는 쾌거를 이룬 것에 그 의의가 있다.
이에 따라 나당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676년 7월의 도림성 전투가 되지만, 도림성 전투 직후 나당 양국 간에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인식한 것은 아니다. 신라의 지배층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가 철수한 676년 2월부터 조금씩 전쟁이 종료되어 간다는 인식을 갖고 內治와 관련된 조치를 취해나갔지만, 양국 모두 나당전쟁이 종료되었다고 인식하게 된 계기는 681년 7월 문무왕의 사망과 신문왕의 즉위 때 조공 · 책봉 사절의 교환이 이루어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681년에 벌어진 김흠돌 등의 모반 사건이다. 신라 사회에서 언제 당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긴장 국면이 지속되고 있었던 상태라면 이러한 사건의 발생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어찌되었든 김흠돌 등이 주도한 내란을 진압한 뒤 신문왕은 682년 정월에 당 고종이 파견한 사신들을 통해 책봉을 받은 다음 곧바로 신궁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나아가 재위 기간 동안 신문왕은 각종 제도를 구축 · 완비하며, 증가한 인구와 넓어진 영토의 신라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신문왕이 이와 같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선왕인 문무왕 대에 있었던 기벌포 전투 승리의 영향과 나당전쟁이 사실상 끝났다는 당대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伎伐浦 戰鬪 및 薛仁貴 關聯 記錄 再檢討
Ⅲ. 神文王의 卽位와 羅唐戰爭 終了에 대한 認識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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